<나는 왜 똑같은 생각만 할까>
계단을 올라갔더니 여덟 명의 사람들이 복도에서 서성이며 대기하고 있다. 당신도 그들과 함께 기다린다. 잠시 후 연구원이 나타나 문을 열고는 모두 자리에 앉으라고 한다. 방에 놓인 의자의 수는 사람 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람들이 서둘러 자리를 차지하고 뒤에서 두 번째 의자 하나만 남았다. 당신은 그 의자에 앉는다. 연구원이 과제를 설명한다.
시 지각에 관한 실험이라고 한다. 참가자 전원이 같은 것을 본 다음 질문에 큰 소리로 대답하면 된다. 실험이 시작되자 연구원이 카드 두 장을 보여준다. 왼쪽 카드에는 선이 하나만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각각 1, 2, 3이라는 번호가 붙은 선이 세 개 있다. 왼쪽 카드에 그려진 선의 길이가 20cm라면, 비교 대상인 오른쪽 카드에 그려진 선은 각각 15cm, 20cm, 17cm다. 참가자들은 오른쪽에 있는 선 중에서 왼쪽 선과 길이가 같은 선이 몇 번인지 답하면 된다.
실험에 앞서 연습으로 몇 가지 예제를 푼다.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제들이다. 연습이 끝나자 연구원은 새 카드를 한 세트 꺼낸다. 실험은 참가자들이 차례로 답을 말하면 연구원이 받아 적는 식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의자에 앉은 사람이 가장 먼저 답하고, 두 번째 의자에 앉은 사람이 두 번째로 답하는 방식이어서, 일곱 번째 의자에 앉은 당신은 일곱 번째로 답을 말한다. 매우 간단하다.
그런데 두 장의 카드에서 길이가 같은 선을 찾는 실험에서 네 번째 문제가 나오자 석연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당신이 보기에는 정답이 오른쪽의 2번 선 같은데 첫 번째 의자에 앉은 사람은 활기차고 단호하게 ‘1번’이라고 대답한다. 분명 그 사람이 틀렸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누구도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연구원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자 두 번째 의자에 앉은 참가자도 ‘1번’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다른 참가자들과 연구원은 무반응이다. 세 번째 사람 역시 주저 없이 ‘1번’이라고 하고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참가자도 마찬가지다.
당신 차례가 되었다. 길이가 같은 건 분명 2번 선이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1번이라고 하는 걸까? 일종의 착시현상인 걸까? 내가 앉은 각도에서만 달리 보이는 건가? 아니면 그들이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보이나? 내 눈이 이상한가? 저 사람들에게는 나보다 더 뚜렷이 보이는 걸까? 모든 사람이 1번 선이라고 했다. 전원이 틀릴 수도 있나? 당신은 주저한다.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네요’라는 의미를 담은 불편한 미소를 짓는다. 당신은 잠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다. 주위를 둘러본다. 이맛살을 찌푸린다. 내가 놓친 게 있을까? 내 생각대로 말해야 하나, 아니면 남들과 같은 답을 말해야 하나? 나 혼자 다른 답을 내놓으면 저 사람들이 짜증을 내지 않을까? 다들 잘하는데 나만 문제라고 연구원이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연구를 망치고 있는 건가?
당신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 4명 중 3명이 하는 것과 같은 선택을 한다. “1번입니다.” 당신은 일부러 틀린 답을 골랐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본 것을 지지하고 당신 눈으로 본 것을 거부했다.
이 실험을 고안한 솔로몬 아시(Solomon Asch)가 규명하려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험 참가자는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말할 것인가?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동조해 일부러 틀린 답을 고를 것인가? 당신은 몰랐지만,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오답을 말하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실험은 지각에 관한 것도, 각도나 시력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일부러 틀린 답을 제시하고 당신이 어떻게 하는지 보는 게 목적이었다.
아시는 집단 동조의 위력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놓고 실험을 했다. 집단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의심스러운 의견이나 주장 앞에서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 사실을 명백히 틀렸을 때마저도 흔들린다. 아시의 실험에서 집단의 오답에 맞춰 자신의 답을 최소한 한 번 이상 바꾼 참가자가 4명 중 3명이었다는 건 주목할 만하다. 이들에게 오답을 말한 이유를 물었을 때 나온 답변 또한 의미심장하다. 다수가 집단에 대한 순전한 존중을 이유로 들었는데, 한 참가자는 “아홉 명 중 여덟 명이 나와 다른 걸 봤다면 객관적으로는 분명히 그들이 옳을 것”이라고 아시에게 말했다.
남들이 명백히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강경하게 맞설 자신이 없었다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한 참가자는 “남들이 틀린 건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옳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고 했고, 다른 참가자는 “그들이 미쳤거나 내가 미친 것 중 하나였는데, 어느 쪽인지 마음을 정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한 참가자는 솔직해지려는 욕구, 똑똑해 보이려는 욕구, 동조하려는 욕구 사이에서 느낀 갈등을 이렇게 표현했다. “말하자면 거기에 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이 옳다고 보려고 애썼지만 조금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엄연한 나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단의 옳고 그름과는 무관하다. 집단의 위력이 사실보다 더 강력했기 때문에, 한 참가자의 말대로 “그들이 틀리면 나도 틀리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집단 속에 있으면 명백한 사실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 증명했다. 사람 수가 많아지면 단순한 사실도 성가신 것으로 변한다. 혼자 있었다면 누구나 길이가 일치하는 선을 찾아내 정답을 말했을 것이다. 집단 속에 놓이면 올바른 답이 때로 모호해지며, 대부분은 정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집단이 가장 잘하는 일은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뚜렷이 보이는 것들을 가려 시야를 제한하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우리는 지원군을 찾는다. 사람들을 충분히 모으면 해결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는다. 그런데 두 번째, 다섯 번째, 열 번째, 혹은 쉰 번째로 가담한 사람이 실제로 가져오는 건 불일치다. 그들은 정보를 차단하는 필터를 덧붙이며, 해결책을 찾는 데 방해가 되고 눈앞의 문제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가림막을 친다.
집단의 기호에 자신을 맞추려고 일부러 틀린 대답을 선택하는 비율이 75%라면, 사람이 많을수록 더 좋은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