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갈 수 없는 이유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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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우엉, 무, 홍당무.

아사코는 슈퍼마켓의 은색 카트에 채소를 잇달아 담는다. 오늘 밤은 돼지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어 된장국을 끓이려고 한다. 그건 구니카즈가 좋아하는 요리 중 하나이다.


“아빠 만나러 갈 건데, 언니도 올래?”

그 제안을 거절한 게 몇 번째일까.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이쿠코는 끈질기게 또 연락한다. 거절하면 그래도 오라고 억지를 부리지도 않고 올 수 없는 이유를 묻지도 않는다. 아사코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 이쿠코는 천사 같다니까”라는 말을 심심하면 하던 또 다른 동생을 떠올린다. 아사코 생각에 하루코 역시 이쿠코 만큼이나 — 어쩌면 그 이상으로 — 천사 같다. 카트를 밀면서 통로를 지나는 길에 국거리 돼지고기 팩을 집는다.

갈 수 없는 이유.

아빠 집에 관한 한, 그것은 구니카즈가 아니었다. 구니카즈는 물론 아내의 외출을 꺼려 하지만 간혹 아빠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면, 적어도 겉으로는 이해를 표하면서 다녀오라고 할 것이다.

돼지고기 다음에는 닭 가슴살도 카트에 담는다. 닭 가슴살은 편리하다. 알코올 성분을 날린 정종을 뿌려 찌면 차가운 전채에 사용할 수 있고, 조그맣게 잘라 튀길 때도 기름이 덜 든다.

아빠를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았다. 하루코 경우는 ‘집을 나간’ 아빠에 대한 분노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듯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아사코는 오히려 평온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아빠를 만날 수 없는 것은 그런 감정과는 무관한, 아사코 자신의 문제였다.

아침에 먹을 베이컨과, 지점토로 빚은 것처럼 질감이 투박한 케이스에 담긴 달걀도 카트에 넣는다. 키친타월과 화장실 휴지도. 아사코는 슈퍼마켓을 좋아한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다 보면 자신이 집안일을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오후 두 시. 평일의 슈퍼마켓은 아직 그렇게 북적거리지 않는다. 캠블리라는 상표의 레몬버터쿠키도 한 박스 카트에 담는다. 이건 구니카즈가 아니라 아사코 자신을 위한 과자이다. 집안일을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고, 깔끔하게 청결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소소한 선물이다.

파스타가 죽 놓여 있는 선반 앞에서 아사코는 그 여자를 알아보았다. 아마 서른 살은 넘었을 것 같다. 눈이 커다랗고 인형처럼 생긴 가녀린 여자, 인형 같다는 인상은 마스카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마스카라를 듬뿍 발라 긴 속눈썹을 강조하고 있다.

눈이 마주쳐, 상대방도 아사코가 알아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대로 스쳐 지나간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다. 이 슈퍼마켓에서 간간이 마주칠 뿐이다. 다만 그녀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여름 어느 날 한눈에 알아보았다. 넘어지거나 다쳐서 생길 수 있는 유의 멍이 아니었다. 팔뚝의 한군데만 집요하게 꼬집어 생긴 멍. 어느 때에는 손등, 어느 때에는 광대뼈 언저리.

구니카즈는 조심성이 많아, 얼굴은 좀처럼 때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쩌다 얼굴을 맞았을 때, 눈 주위는 신기하리만큼 잘 붓는다는 것을 아사코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다 아사코는 이누야마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1965년 4월의 일이다. 아사코 자신은, 얌전한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아무 부족함 없이 자랐고, ‘2번가 집’에 있는 앨범의 수많은 사진 중에 아사코 사진이 가장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얗고 보드라운 천에 싸인 갓난아기 적 스냅 사진에서, 기모노를 입고 사탕을 손에 든 시치고산 때 사진, 입학식과 졸업식, 운동회, 피아노 발표회. 학생 시절의 승마 대회 때, 승마복 차림으로 말에 올라탄 사진도 있다. 그리고 물론 결혼식 사진도.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이혼한 후였지만, 아빠가 나서서 모든 절차를 관리해주었다. 교회에서 식을 치르고, 피로연은 아빠 마음에 드는 회원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했다. 정원이 넓어 마지막에는 가든파티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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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사코는, 파란색을 몸에 지니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에 따라, 동생 둘이 선물해준 밝은 파란색 가터벨트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아빠는 기분이 좋아 호탕하게 웃었고, 구니카즈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가슴이 대담하게 파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하루코, 이쿠코는 이대로가 좋다면서 청바지 차림으로 참석했다. 엄마는 이탈리안 그레이하운드종 밤비 — 그때는 아직 살아 있었다 — 를 데리고 나타났다. 밤비 목에 진주목걸이가 걸려 있었던 것도, 아사코는 그리운 심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카트를 밀면서 손님이 줄 서 있지 않은 계산대를 고른다. 무의식중에 ‘그녀’의 모습을 찾았지만, 계산대 부근에는 없었다.

헌책방과 약국과 갈비구이집이 복작복작하게 들어선 좁은 골목길을 걸으면서 하루코는, 이 거리에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개찰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이쿠코는, 만나자마자 하루코의 목을 껴안고 볼에 입맞춤하고는 말했다.

“하루코 언니가 와줘서 정말 기뻐.”

여전히 푸석푸석한 머리에 빈티지한 코트를 입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 달에 두 번 정도’ 아빠를 찾아간다는 이쿠코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에코다에 혼자 살고 있어서’ 이 동네를 잘 알고 있다. 저 편의점에는 귀여운 아르바이트생이 있다느니, 북쪽 출구 앞의 찻집 — 그게 보통 카페를 말하는 것인지, 경단을 파는 전통 찻집인지, 또는 선술집 이름인지 하루코는 도통 감이 안 잡히지만 — 에는 아주 귀여운 고양이가 있다느니, 음식점의 불빛으로 와글와글한 골목길을 나란히 걸으면서 이쿠코는 이런저런 설명을 해준다.

“춥네. 냄새가 좋아서 막 당기는데.”

지나가면서 가게 안을 슬쩍 들여다본 이쿠코는 군침이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가 사는 맨션은 역에서 꽤 떨어진 장소에 있다. 벽에 짙은 회색 타일을 붙인 아담한 건물이다. 아빠 방은 2층 끄트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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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을 누르자마자 눈이 열리고, 우람한 체구의 아빠가 스웨터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 아빠.”

이쿠코가 말한다.

“미안해, 늦게 와서.”

늦어진 것은 이쿠코 탓이 아니라 하루코 사정 때문이었지만, 아무튼 이쿠코는 그렇게 말했다.

“괜찮다. 몇 시든 무슨 상관이냐.”

어서 들어오라고 해서 신발을 벗는다. 혼자 살기에는 충분하다는 아빠 집은 침실이 따로 있는 원룸으로 비교적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딱 하나 있는 좌식 의자와 키 낮은 테이블.

“여전히 썰렁하네.”

하루코는 애써 밝게 말하고는 바닥에 앉았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아빠가 물었다.

“도키코 씨네 갈 거야?”

이쿠코가 그렇게 되묻는다. 도키코 씨는 아빠가 ‘부엌’ 삼아 드나드는 선술집이다.

아빠가 혼자 살기 — 처음에는 여자와 함께였지만 — 시작한 지 7년이 되었다. 하루코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격차’이다. 예전에는 앤티크 가구에 빠져서 식기장과 테이블을 구하려고 일부러 영국까지 갔던 사람이다. 그것들이 현재 엄마 소유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서재에 깔려 있던 아름다운 카펫과 희귀본과 그림 컬렉션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수집해 들였던 사람의 취미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지금 이 방에서, 그 옛날의 아빠를 그나마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는 낮게 흐르는 브람스뿐이다.

돌아보니, 테이블에 맥주병이 놓여 있었다.

“어? 아빠, 도키코 씨네는?”

하루코가 묻자, 컵 세 개를 용케 한 손에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이쿠코가 말했다.

“전혀 듣고 있지를 않네. 전화해봤더니 지금 손님이 많대. 그래서 우선 집에서 마시기로 했어.”

아, 그랬구나, 하고 대답하면서 일어나 이쿠코를 따라 부엌에 간다. 부엌은 좁지만 역시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다. 형광등의 하얀 빛 아래서 아빠가 우설을 자르고 있었다. 이쿠코는 접시과 젓가락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마요네즈까지 꺼내 옮긴다. 구석에 놓인 조그만 전기밥통이 눈에 뜨여, 하루코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하루코는 거기에 멀거니 서 있었다. 리놀륨 바닥을 밟고 있는 아빠의 맨발 — 중심은 안정적이지만 울퉁불퉁하고 아무런 손질도 하지 않은, 검붉은 피부와 갈라진 발톱 — 을 멍하니 쳐다보고는, 하얗고 갸름한 구마키의 발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빠, 그거 옛날부터 좋아했지.”

이쿠코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아빠는 손에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캔을 들고 있었다.

“언니, 이걸로 따드려.”

이쿠코가 캔 따개를 건네주어, 하루코는 겨우 할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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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는 슈만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다랑어포를 얹은 양파 슬라이스와 우설,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겨우 그런 것들을 안주 삼아 맥주에 이어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급기야 정종까지 따르게 되었다.

아빠는 과거에 가족끼리 교류했던 옛 친구 얘기를 했다. 아빠와 마찬가지로 음식점 경영으로 성공한 그 남자는 가족과 함께 지금 캘리포니아에 산다고 한다.

“운동신경이 좋은 남자였지.”

아빠와 그는 테니스와 골프를 함께 쳤다.

밤 열 시가 넘을 즈음, 놀랍게도 도키코 씨가 왔다. 요것조것 챙긴 반찬과 금눈돔 조림과 주먹밥을 싸들고.
도시락만 내려놓고 황급하게 돌아가는 도키코 씨를 보고서도 아빠나 이쿠코나 놀란 기색이 없어서, 이런 일이 자주 있나 보다고 하루코는 생각한다. 자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반찬은 숭어알젓과 푸른 잎채소 절임과 토란이었다. 테이블이 순식간에 화려해진다.

“소주 마셔도 돼?”

하루코가 그렇게 말하면서 부엌으로 갔다.

“나는 위스키로 할래.”

이쿠코가 한 손을 번쩍 들고 말해 하루코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빠 집에는 술만큼은 풍성하게 있다.

“아사코는 어찌 지내고 있냐?”

아빠가 그렇게 물은 것은 안줏거리가 거의 없어져 갈 때였다. 이 집에 오면 늘 그렇지만, 하루코는 본의 아니게 푸근하게 늘어져 있다.

“아, 맞다 맞다. 언니가 아빠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

이쿠코가 대답했다.

“잘 지내는 것 같아. 잘 지내고 행복하대.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말했어.”

이쿠코의 말투를 하루코는 남편에게 꼼짝 못 하는 아사코에 대한 불만으로 받아들였는데, 아빠는 환하게 웃었다.

“잘 지내고 행복하다고? 아주 좋은 게구나.”

아사코는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딸이었다. 물론 세 자매가 모두 차별 없이 사랑받았지만, 아빠에게 그녀가 특별한 딸이라는 것은 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자매 둘이 부엌에 서서 설거지를 한다.

“아니, 됐다. 아빠가 하마.”

아빠가 다가와, 결국 셋이서 뒷정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금방 끝났다.

“구마키 씨에게 보여주고 싶네.”

평소 설거지를 구마키가 도맡아 한다는 것을 아는 이쿠코가 하루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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