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처럼 대담하라>
손자가 말했다.
“전쟁은 국가의 중대사인 군국기무(軍國機務)이다. 백성의 생사 및 국가의 존망과 직결된 까닭에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조조가 풀이하기를, “이는 전쟁의 기본 이치인 병도(兵道)를 말한 것으로 가르침과 훈령을 통해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군주가 백성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백성들은 두려워한다. 두려움의 근원은 군주가 과연 백성과 운명을 함께할 것인지를 의심하는 데 있다.”고 했다.
_ 『손자약해』 「시계」
예나 지금이나 모름지기 줄을 잘 서야 한다.
조조가 원소와 함께 ‘반 동탁’을 기치로 내걸고 군사를 일으킨 것은 사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군벌 상쟁의 성격이 짙었다. 모택동이 제2차 북벌 이후 중국의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장개석을 반 인민의 군벌 괴수로 낙인찍고 농민들로 구성된 홍군을 창설한 것과 비슷하다.
동탁이 만약 조조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다면 그는 이후 새로운 왕조를 세워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그를 추종했던 당대 최고의 인물인 순상(荀爽) 및 채옹(蔡雍) 모두 승상 등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모시던 인물의 흥망이 추종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다. 『사기』 「유협열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갈고리를 훔친 자는 주살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원래 이는 『장자』 「거협」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성인이 죽어버리면 큰 도둑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천하는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도 그치지 않을 것이니 성인을 중용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둑을 거듭 이롭게 하는 것이다. 갈고리를 훔친 자는 죽임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가 되면 가문이 인의를 세운 것으로 미화되니 이는 곧 도둑놈이 인의와 성지(聖智)를 훔친 것이 아닌가?”
나라를 세운 창업주 모두 따지고 보면 도둑질을 창업으로 미화한 도적놈이 아니냐고 일갈한 것이다. 장자의 일갈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만큼 나라를 훔친 도적질은 이내 의거로 미화되고, 패자의 행보는 의로운 행보조차 역적질로 매도되기 마련이다. 난세의 시기에 군웅들이 내건 명분은 사실 싸움이 끝나봐야 최종평가가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분이 분명하고 타당한 쪽을 선택하라.
초평 2년인 191년 정월 효산(崤山)의 동쪽인 산동(山東)의 제후들이 다시 모여 동탁 토벌 문제를 상의할 때의 일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원소 등은 이런 구실을 내세워 황제의 폐립을 획책했다.
“천자가 어린 데다 동탁의 핍박을 받아 관문이 닫힌 먼 곳에 있어 생사를 알 수조차 없다. 황실에서 가장 뛰어난 유주목 유우(劉虞)를 천자로 옹립하도록 하자!” 이는 조조의 생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무제기」의 배송지주에 인용된 『위서』는 당시 조조가 펼친 반론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동탁의 죄악이 사해에 드러나 우리가 거병하자 원근을 막론하고 호응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됐다. 이는 우리가 대의를 좇아 기병했기 때문이다. 지금 유주(幼主)가 비록 미약해 간신에게 제압당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전한 초기의 창읍왕처럼 망국의 단서를 내보인 적이 없다. 만일 하루아침에 폐립이 이뤄지면 세상 사람 가운데 누가 동의하겠는가? 제군이 유우를 옹립하기 위해 북쪽을 향하면 나는 장안의 천자를 모시기 위해 서쪽을 향하겠다.”
조조의 반론이 타당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로 인해 조조와 원소는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때 원소는 조조의 동의를 얻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그는 조조에게 이같이 말했다.
“지금 원공의 세력이 성하고 군사 또한 강합니다. 천하의 호걸 중 그 누가 그보다 뛰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동탁을 대신해 전횡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조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원소의 속뜻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의명분을 잃으면 ‘반 동탁’의 기치가 무색게 된다. 조조와 원소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원소는 조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해 2월 끝내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새 황제로 옹립고자 했다. 유우는 비록 황실의 친척이기는 했으나 한헌제와는 촌수가 멀었다. 더구나 유우 자신이 이를 원치 않았다. 그는 원소가 자신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한다는 서신을 받자 정색을 하며 사자를 이같이 꾸짖었다.
“지금 천하가 혼란해 왕이 나라 밖으로 피신(蒙塵)을 했어도 나는 국가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국치(國恥)를 씻지 못하고 있소. 제군은 각 주군을 점거하였으면 응당 황실을 위해 전심전력해야 하거늘 어찌 역모를 꾀해 서로 몸을 더럽히려 하는 것이오.”
원소는 유우를 내세워 천하를 손에 넣으려는 계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내 가장 가까운 동료 한복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다. 당시 그는 한복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음에도 휘하 문객의 간계를 이용해 마침내 한복을 내쫓고 기주를 손에 넣었다. 한복은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당시 조조는 자신의 세력이 너무 약해서 원소의 이런 비열한 행위를 제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의 측근이었던 포신은 조조를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원소가 맹주가 되면 권세를 이용해 홀로 이익을 챙길 것이니 장차 천하에 커다란 화란을 일으킬 것이오. 이는 또 하나의 동탁이 있는 것과 같소. 지금 그를 제압하고자 해도 우리에게는 아직 힘이 없어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화를 부를 뿐이오. 그리되면 장차 어찌 난을 구할 수 있겠소? 잠시 황하 이남에서 상황의 변화를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할 것이오.” 『삼국지』 「포훈전」의 배송지주에 인용된 『위서』
실력을 배양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뛰쳐나오라.
조조가 천하 경략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데에는 포신의 이런 권고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조조는 원소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포신의 이런 충심 어린 권고를 들은 뒤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도광양회의 자세로 실력을 배양하다가 때가 오면 숲에서 뛰쳐나오는 맹호출림(猛虎出林)의 기세가 형성된 배경이다.
조조는 『손자약해』 「시계」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군주가 백성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백성들은 두려워한다. 두려움의 근원은 군주가 과연 백성과 운명을 함께할 것인지를 의심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일반 백성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확고히 묶어두라고 주문한 것이다. 조조가 『한비자』를 탐독하며 법가사상을 충실히 받아들인 점을 고려할 때 조조의 리더십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역설한 난세의 군주 리더십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종오(李宗吾)가 『후흑학』에서 말하는 ‘속마음이 시커먼’ 심흑(心黑)의 전형적인 인물은 삼국시대 안에서 조조가 아니라 바로 원소였다. 20세기 초 지금의 사천성 출신 이종오는 삼국시대 영웅들의 리더십을 새롭게 평한 『후흑학』을 펴내 낙양의 지가를 올린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조조를 심흑의 대가, 유비를 낯가죽이 두꺼운 면후(面厚)의 대가, 사마의를 면후와 심흑 두 측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달한 후흑(厚黑)의 달인으로 꼽았다. 유비와 사마의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그러나 조조에 대한 평은 일부분만 맞는다. 조조는 전장에서만 심흑을 발휘했다. 전쟁 자체가 적을 기만해 승리를 거두는 궤도(詭道)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이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심흑의 달인에 해당한다. 주목할 것은 조조가 심흑의 모습을 보인 것은 적과 싸울 때뿐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평시에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오히려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인재를 크게 질투한 원소, 수시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군자로 포장한 유비, 짐짓 미친 척하며 정적을 안심시킨 뒤 일거에 때려눕힌 사마의 등이 오히려 평시에도 심흑을 발휘한 당사자들이다. 조조는 오히려 평시에는 전시와 달리 심흑과 정반대인 심백(心白)의 모습을 보였다고 평할 수 있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평시에 궤도를 구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비록 새 왕조 창업의 큰 발걸음을 떼기는 했으나 죽는 순간까지 한나라 황실을 보위한다는 대의명분을 잃지 않았다. 청조 말기에 태평천국의 난을 제압한 증국번(曾國藩)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증국번이 태평천국을 제압하고 회수와 장강 일대를 포함해 천하의 절반을 차지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와 청조에 반기를 들 것을 권했다. 증국번은 이를 일축했다. 천명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새 왕조가 들어설 것으로 본 것이다. 그가 끝까지 청조에 충성을 바친 이유다. 훗날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여러 얘기가 나왔으나 그가 생각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모두 아니다. 나는 평생 조조를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했다!” 공맹 사상의 수호자를 자처한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의용군을 결성해 이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조조의 ‘제폭구민’ 행보를 배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본격화할 때까지 한족 출신 매국노를 뜻하는 한간(漢奸)으로 매도당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공자가 반동의 표상으로 몰린 것과 닮았다. 비록 100여 년의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21세기에 들어와 증국번이 항간에서 문득 역대 최고의 승상으로 칭송받던 제갈량을 누르고 성상(聖相)의 칭송을 듣게 된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전개된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