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바다 속에 세운 도시, 기차는 그곳으로 내달렸다. 천오백 년 전, 훈족의 말발굽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이 아드리아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까지 쳐들어오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갯벌에 살 곳을 만들었다. 이것이 베네치아의 시작이다. 살고자 하는 절박함이 낳은 도시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베네치아 여행의 시작점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했다. 키스와 포옹이 가득한 역을 벗어나니 눈앞에 수상도시가 펼쳐졌다. 운하 양옆으로 고풍스런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가운데로는 물살을 헤치며 크고 작은 배들이 지나다녔다. 그림 같은 도시를 넋 놓고 바라보다, 빨간모자를 쓴 뽀얀 볼의 꼬마가 눈에 띄었다.
아이는 깡총깡총 뛰며 다리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그를 따라 물의 도시 속으로 들어갔다.
호텔 체크인을 하며 받은 열쇠에는 방번호가 없었다. 쓰여 있는 ‘로살바 카리에라’가 방 이름이었다. 파스텔 초상화로 유명한 이곳 출신 18세기 여류화가다. 여인 이름의 방이라니 역시 베네치아였다.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한 낯선 도시로 발을 내디뎠다. 118개의 섬과 400여 개 다리가 연결된 미로 같은 곳을 걷기 시작했다.
운하에서 작게 철썩이는 물결 소리가 들렸다. 쾌쾌한 물내음도 맡아졌다. 이곳은 하수가 운하에 버려져 하루 두 번 바닷물에 씻겨 나간다. 수백 년간 이런 자연정화 환경을 ‘라구나 비바(살아있는 갯벌)’라고 하
여 이들은 목숨처럼 지켜왔다.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천 년 이상 하수를 정화하는 도시다. 하수가 운하에 좀 흐르면 어떤가, 이렇게 도시가 아름다운데.
골목을 헤매다 회색빛 낡은 건물벽에 붙어 있는 하얀 푯말과 마주쳤다. ‘리알토 다리 방향(PER RIALTO)’. 방랑을 끝내고 갈 방향을 결정했다. ‘리알토 다리’였다.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가장 오래된 다리이며 베네치아의 상징이다. 어둡고 인적 드문 곳을 한동안 헤맸기 때문일까 밝고 사람 많은 곳이 그리웠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에서 멀리까지 잘 바라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보며 가보지 않은 장소를 찜하고 탐험을 떠났다. 그곳이 몇 시간 거리든 상관없었다. 멀고 힘들었지만 가는 내내 즐거웠고 낯선 곳에 가면 뿌듯함이 있었다. 버스종점 가보기도 단골 여행이었다.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갔다. 가면서 거리풍경을 음미했고 종점에 도착하면 호기심이 달래졌다. 지난 봄, 눈에 띈 사진은 이런 나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대운하 위로 놓인 리알토 다리였다. 여름날 다시 그 다리와 만났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놓인 18세기 안토니오 카날레토의 그림 속에서였다. 이번 겨울, 이탈리아행 항공권이 손 안에 있었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운하 위로 리알토 다리가 보였다. 아치형 대리석 다리로 16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다리 불빛은 휘황찬란했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환한 불빛의 상점과 반짝이는 전구 장식으로 파티장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삼백 년 전 그림 그대로였다. 잘 보존된 고대 도시가 부러웠다. 다리가 잘 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 와인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었다. 진한 포도향이 불빛 속 다리와 뒤섞였다. 창밖 가로등 빛이 별 모양으로 갈라져 운하 위로 반짝였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눈을 간지럽혀 잠에서 깼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날이었다. 지난밤 잿빛이던 대운하 옆 건물들은 붉은빛, 노란빛을 드러냈고, 형형색색의 배들도 분주히 검푸른 운하를 오갔다.
호텔 팸플릿에서 발견한 무라노 섬 유리공장 투어를 예약했다. 수상택시도 무료인 데다 목적지인 부라노 섬과도 가까웠다. 수상택시에 올라 따사로운 햇빛과 마주하며 앉았다. 햇빛 속으로 동승자 여인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밤색 머리결, 불그스레한 볼, 뽀얀 목. 그녀는 마치코였다. “본 조르노” 하며 작고 하얀 손을 내밀었다. 엉겹결에 “하이” 하며 그 작고 앙증맞은 손을 잡았다. 많은 사람 틈에서 고독을 지키는 게 불가능하다 괴테가 그랬던가. 홀로 여행하던 그가 프랑스인을 만난 것처럼 일본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교토 출신으로 오늘 밤 늦게 떠나는 걸 아쉬워했다. 숨결이 느껴지는 작은 배 안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단둘이었다. 갑자기 배가 요동쳐 쓰러질 것 같은 그녀의 팔과 몸을 잡았다. 배가 잠잠해진 후에도, 얼마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응큼하긴, 왜 저를 안아요?”
“아, 그게. 다치실까 봐.”
“호호. 농담이에요. 고마워요.”
달아오른 얼굴 때문인지 햇살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같이 오랜 여행을 떠나온 것 같았다.
무라노는 유명한 베네치아글라스의 본고장이다. 방문한 공장에선 유리세공인이 화병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발랄한 몸짓, 신기한 표정의 그녀에게 신경이 쓰였다.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노작가 아셴바흐가 떠올랐다. 아셴바흐는 미소년 타지오의 모습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어느 순간 나도 발랄하고 사랑스런 마치코의 모습을 좇고 있었다. 한 시간 넘는 시간이 몇 분처럼 느껴졌다. 타지오를 너무 사랑한 아셴바흐는 곁을 떠나지 못하고 전염병으로 베네치아에서 죽는다. 그처럼 되기 싫었을까, 돌아가는 배를 타지 않기로 했다. 가고자 한 부라노 섬으로 혼자 가기로 한 것이다. 우연히 볼 수 있으면 보자며 그녀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돌아섰다. 다시 고독한 여행자가 되었다. 아쉬움 때문인지 거리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도착한 부라노 섬은 초등학생의 스케치북 그림처럼 화려했다. 노란, 푸른, 보랏빛 벽과 하얀 창틀, 초록색 문이 즐비했다. 이러한 건물 색상은 어부들이 바다에서 돌아와 집을 쉽게 찾도록 색을 칠한 것에서 유래했다. 브랜드 ‘베네통’의 화려한 컬러가 어디서 왔는지 납득이 갔다. 베네치아가 속해 있는 베니토 주가 본고장인 것이다. 걷다 눈에 띈 초록 간판의 해산물 식당 ‘로마노’에 들어갔다. 전채요리로 조개스프를, 메인으로 오징어먹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부드러운 조갯살과 맑은 국물이 식욕을 자극했다. 이어 나온 먹물 스파게티는 검고 윤기가 흐르는 면 위에 파슬리가 뿌려져 있었다. 접시 주변에는 잘게 썰린 노란 파프리카가 있었다.스파게티 면을 조금 말아 입안에 넣는 순간 ‘아!’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평생 먹어본 스파게티 중 최고였다. 화이트와인 한 모금이 입속에서 면과 만나니 천상의 음식이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