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Sep 05. 2016

01. 프롬 : 진정한 사랑은 성장을 낳는다.

<철학자의 조언>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가 1954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직후 밝힌 소감을 인용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과감히 지금의 상황을 보십시오. 인간이 초인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 이 초인은 초인적 힘을 지닐 만한 이성의 수준에는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 우리가 이전에는 온전히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 이 초인은 자신의 힘이 세짐과 동시에 점점 더 초라한 인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이제 명명백백해졌습니다. (…)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의식해야 할 점은, 이미 오래전에 의식해야만 했던 점은 초인으로서의 우리는 비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초인이 되었지만, 오히려 초라한 비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20세기 인류가 처한 상황에 대한 진단이었다. 프롬은 이런 상황을 두고 “그릇된 환상의 종말”이라고 했다. 20세기에 인류는 물질적 풍요에 기초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제한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것은 산업기술의 발전이 보증하는 약속처럼 보였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컴퓨터가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는 등 산업기술의 발전은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그러나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고 희망은 사라졌다. 프롬은 몇 가지 양상을 지적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제적 성장은 일부 부유한 나라에 국한되었을 뿐,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부유한 나라 안에서도 소수의 부유한 자와 다수의 가난한 자 사이의 격차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제한 없는 자유의 약속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었다.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의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1889~1977)이 보여주듯이, 인간은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인간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취미는 대중매체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 대중매체를 지배하는 건 일부의 자본가와 정부였다. 또한, 산업기술의 발전은 심각한 생태학적 위기를 낳았다. 지구 생태계의 파괴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실질적 위협이 되었다. 인간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상태에 처한 것이다.
     
프롬이 표현했듯이 환상 같은 약속은 그릇된 것이었음이 드러났고, 그래서 그릇된 환상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본주의사회의 모순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산업기술 발전의 성과는 소수에게 집중된다. 그들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행복과 자유를 구가했다. 반면 다수는 가난과 무권리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리고 소수는 무한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자연을 착취했고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왔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사활이 걸린 문제임에도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첫째 이유는 인간의 심리 때문이다. 프롬은 1936~1939년까지 3년간 계속된 스페인 내전 당시 커스틀러라는 사람의 체험을 예로 들었다.
     
“프랑코 군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커스틀러는 마침 한 친구의 안락한 별장에 머물러 있었다. 군대가 그날 밤 안으로 그 집에 당도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총살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고, 도망을 친다면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다. 그러나 바깥은 춥고 비 내리는 어둠뿐이었고 집 안은 따스하고 아늑했다. 그래서 그는 주저앉았고, 결국 포로가 되었다.”    

프롬은 인간이 커스틀러처럼 지금 당장 겪어야 할 고생보다는 차라리 막연해 보이는 미래의 재난을 택하는 심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요인에는 심리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롬은 다른 선택, 즉 대안이 없을 때도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프롬은 1976년에 발간된 《소유냐 존재냐(Haben oder Sein)》에서 인간의 두 가지 실존 양식인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의 분석과 아울러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의 차이


소유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별개의 것인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유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롬은 소유와 존재의 구분이 인간 실존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소유와 존재를 구분하는 문제는 몇 년 전부터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빌려서 개인이나 집단을 구체적인 고찰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두 실존 양식의 차이를 이루는 경험적 토대를 찾아보고자 했다. 나의 고찰이 끌어낸 명백한 결론은 이 차이는 생명에의 애착과 죽은 자에 대한 애착의 차이와 함께 인간 실존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를 구성한다는 것과 또한 인류학과 정신분석학의 경험적 자료들이 제시한 바로는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소유와 존재는 삶과 죽음만큼 인간에게 결정적인 문제라고 했다. 소유와 존재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삶의 양식이 달라진다. 개인의 성격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격도 달라지는 것이다. 프롬은 두 가지 삶의 양식을 구분하여 “소유적 실존 양식”과 “존재적 실존 양식”이라고 했다.
     
소유적 실존 양식은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삶의 양식이다. 반면 존재적 실존 양식은 모든 것과 참다운 관계를 맺으려는 삶의 양식이다. 자본주의사회는 근본적으로 소유를 지향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존재적 실존 양식의 실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대다수 사람이 소유를 지향하는 삶의 양식을 당연한 존재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롬은 소유적 실존 양식과 존재적 실존 양식이 모두 일상생활에서 구분되어 나타난다면서 몇 가지 사례를 들었다. 그중 학습과 대화, 그리고 사랑에 관한 사례를 소개하기로 하자.
     
먼저 학습에서 소유적 실존 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과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소유적 실존 양식의 학생들에게 학습 목표는 학습한 것을 기억하거나 기록하여 보관하는 것이다. 즉 학습 내용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를 들을 때는 강의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필기한다. 그리고 필기한 것을 암기하여 시험에 활용한다. 따라서 소유적 실존 양식을 가진 학생들의 사고는 넓지 않다. 그 학생들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암기만 할 뿐, 그 주장을 적용하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입식 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모습이다. 
     
반면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학생들은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인다. 그들은 백지상태로 강의를 듣지 않는다. 강의 주제를 미리 생각해 보고 의문이 있으면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강의에 매우 흥미를 느낀다. 미리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의를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강의에 임한다. 강의를 들으며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떠올리고 그 해결 방안을 찾는다. 강의에서 습득한 지식을 그저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에서 충격을 받고 자기 생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창의적 학습을 하는 학생들이 바로 존재적 실존 양식의 학생들이다.
     
다음으로 대화에 대해 알아보자. 의견이 다른 두 사람이 대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두 사람이 소유적 실존 양식의 사람들이라면 서로 자기 의견을 양보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소유물이므로, 의견을 바꾼다는 것은 손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자기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적절한 논제를 끌어내려고 애를 쓴다. 반면 대화를 하는 한쪽이 존재적 실존 양식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는 자기 의견을 잊어버린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지위조차 잊어버린다. 그는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낸다. 프롬은 두 부류의 차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고수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거리끼는 일이 없으므로 대화에 활기를 가지고 임한다. 그의 활기가 전염되어 대화의 상대방도 흔히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판은 상품(정보, 지식, 지위)을 교환하는 장터이기를 중단하고, 누가 옳은가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 진정한 대화의 마당이 된다.”
   
이제 사랑에 대해 살펴보자. 그런데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어떤 물건이나 상품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그 행위를 통해 소유적 실존 양식의 사람과 존재적 실존 양식의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 소유적 실존 양식에 젖은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 즉 연인 혹은 배우자를 구속하고 지배하려 한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가 사랑이라 말할 때 그것은 사실상 사랑이 없음을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에는 연인이나 배우자에 대한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도 있다. 프롬은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000년 서구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육체적 학대에서 정신적 학대에 이르기까지, 무관심과 순전한 소유욕에서 사디즘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에게 가한 부모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보고들이 어찌나 충격적인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통례라기보다는 예외라고 여겨질 지경이다”라며 한탄했다.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사람의 사랑은 다르다. 그에게 사랑은 생산적인 활동이다. 그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알고자 하고, 상대방에게 몰입하며, 상대방을 보고 즐거워한다. 그의 사랑은 상대방을 소생시키며 상대방의 생동감을 증대시킨다. 그래서 프롬은 진정한 사랑이란 “소생과 성장을 낳는 과정”이라고 했다. 존재적 실존 양식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무엇이든 베풀고, 서로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런데 프롬은 결혼이 상황을 바꾸어놓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결혼은 서로의 육체, 감정, 관심을 독점할 권리를 부여한다. 그래서 어느 쪽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애쓸 필요가 없게 되고 사랑은 소유하고 있는 무엇, 즉 하나의 재산이 되어버릴 위험이 생긴다. 그래서 프롬은 결혼 이후 두 배우자의 태도가 소유적 실존 양식으로 변할 수 있음을 경계했다. 상대방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기대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랑은 중단되어버린다.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랑이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인간은 두 가지 성향을 가지고 있다.


소유적 존재 양식과 실존적 존재 양식의 연원은 무엇일까? 프롬은 소유적 실존 양식이 사유재산에서 파생되어 나왔다고 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사유재산은 실질적인 불가침의 권리다. 사유재산의 원칙에 대해 프롬은 “내가 내 재산을 어디에서 어떻게 취득했으며,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은 그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법을 저촉하지 않는 한, 나의 권리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에서 사유재산의 소유자는 소수다. 대다수 사람은 재산이 없거나 아주 적다. 그렇다면 대다수 사람은 소유적 실존 양식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다수 사람이 소유적 실존 양식의 삶을 살아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프롬은 소유의 범위를 확대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즉 소유의 대상을 재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나 애인 같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건강이나 일 같은 것까지도 모두 소유의 대상으로 여긴다.

프롬(Erich Fromm, 1900~1980)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들을 생각해 보라. ‘내 선생님’, ‘내 주치의’, ‘내 여행’ 등 소유의 느낌을 주는 말들을 사용한다. 단지 말 뿐인가. 선생님이든 주치의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소유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 여행’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여행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원한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여행사에 항의한다. 소유적 실존 양식에서는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프롬의 말을 들어보자.
     
“소유적 실존 양식, 재산과 이윤을 지향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권력에의 욕구, 말하자면 권력에의 의존성을 낳는다. 지배하려는 상대 생명체의 저항을 깨부수기 위해서 나로서는 폭력이 불가피해지며, 나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앗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맞설 힘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사유재산을 가지려는 욕망은 노골적으로든 내심으로든 남의 것을 강탈하기 위해서 폭력을 쓰고 싶은 충동을 우리의 마음속에 부추긴다. 소유적 실존 양식의 인간은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우월하다는 데에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에서, 그리고 결국 정복하고 약탈하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소유적 실존 양식의 심리적, 사회적 연원은 쉽게 밝힐 수 있지만, 존재적 실존 양식의 연원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프롬에 따르면, “소유는 사물과 관계하며 사물이란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존재는 체험과 관계하며 체험은 묘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학습, 대화, 사랑 같은 일상생활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존재적 실존 양식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프롬은 푸른색 유리의 사례를 통해 어떻게 존재적 실존 양식이 드러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푸른색 유리가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 유리가 다른 색깔을 모두 흡수하여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즉 푸른색 유리는 사실 푸른색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소유적 실존 양식을 제거하는 것에 비례하여 존재적 실존 양식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프롬은 존재적 실존 양식이 독립과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고 했다. 그래서 존재적 실존 양식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을 ‘능동성’에 두었다. 여기에서 능동성이란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내면적 활동 상태를 의미한다. 즉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소질과 재능, 즉 천부적으로 갖추어진 인간의 재능을 표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적 실존 양식은 자기를 새롭게 하고 성장시키며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존재적 실존 양식의 연원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 프롬은 “우리 인간은 존재하고자 하는, 뿌리 깊이 타고난 욕구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표출하려는 욕구, 활동하고자 하는 욕구, 타인과 관계 맺으려는 욕구, 이기심의 감옥에서 빠져나가려는 욕구”를 갖는다고 하여, 존재적 실존 양식의 연원이 개개인의 마음에 있음을 밝혔다.
     
프롬에 의하면, 우리는 소유하려는 성향과 존재하려는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유하려는 이기적 욕구는 장려되지만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존재적 욕구는 극도로 억압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프롬은 자본주의사회를 이렇게 고발했다.
     
“소유-이윤-사유재산의 원칙을 토대로 하는 사회는 소유 지향적인 사회적 성격을 낳으며, 그렇게 일단 지배적인 행동 유형이 수립되면 그 안에서는 그 누구도 국외자가 되거나 추방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국외자나 추방자가 될 위험을 피하려고 모든 사람은 다수에게 적응한다. 그러나 실상 이 다수를 묶어놓고 있는 것은 상호 적대감에 불과하다.”
   
소유적 실존 양식이 지배적이 되면 서로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갈등이 지배적이게 된다. 사람들은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깨어 있는 유토피안


프롬의 결론은 자명하다. “존재 지향에 힘입어 소유 지향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서두에서 인용했듯이 프롬에 따르면, 인간은 대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프롬은 네 가지 조건만 갖추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 고통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음을 아는 것, 고통 극복을 위해 특정 행동 규범을 갖고 현재의 생활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그 네 가지다. 이것은 부처가 가르친 사성제(四聖諦),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와 일치한다.
     
사실 프롬이 제시한 네 가지 조건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충분히 이루어낼 수 있는 조건들이다. 프롬은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다는 전제 아래 새로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먼저, 프롬은 새로운 인간의 성격으로 21가지를 제시했다. 그것들은 모두 소유 지향성을 타파하고 존재적 실존 양식을 펼쳐나가기 위한 것들이다. 그중 몇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세계를 지배하며, 그래서 결국 자기 소유물의 노예가 되는, 그런 소유에의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과 관계에의 욕구, 관심, 사랑, 주변 세계와의 연대감을 바탕으로 한 안정감, 자아 체험, 자신감. (…)
축재(蓄財)와 타인을 착취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어 가지는 데에서 우러나는 기쁨. (…)
사랑하는 능력과 아울러 비판적이며 비감상적인 사고 능력을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것. (…)
참을 수 없는 조건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실제적 가능성을 선취한다는 의미에서의 상상력의 계발. (…)
모든 생명체와 일체감을 느끼는 것. 그럼으로써 자연을 정복, 지배, 착취, 약탈, 파괴하려는 목표를 버리고, 그 대신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협동하려고 노력하는 것. (…)
운명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아득한 목표 지점이 어디에 있든 간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명의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왜냐하면, 그렇게 의식하며 능력껏 최선을 다하는 삶은 그 자체로 충족되는 것이므로, 그것의 성취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에 대해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일은 자칫 공상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프롬은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안”, 즉 공상가가 아니라 “깨어 있는 유토피안”, 즉 이상주의자라고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00. <철학자의 조언> 연재 예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