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조언>
사마천은 공자(孔子, B.C. 551~B.C. 479)에 대해 이렇게 썼다.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모두 생존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일단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포의(布衣)로 평생을 보냈지만 10여 세대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학자들이 그를 추앙한다.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 안의 육예(六藝)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 공자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공자는 포의, 즉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최고의 성인이라고 했다. “육예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 즉 학자들은 물론 천자와 왕후도 공자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쓴 것은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370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학자들은 공자를 추앙했고, 정치와 학문에서 공자의 말씀이 판단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뿐이겠는가.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무려 25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자는 동아시아의 정치와 학문에서 절대적 권위를 누렸다. 오늘날에도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는 여전한 연구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교양서로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한 사마천의 평가는 타당했다. 공자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시대적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문제들을 탐구하고 그것들과 씨름하며 고민과 사색을 했다. 자기 시대의 문제에 치열하게 부딪혔기 때문에 오히려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칭송받는 것이다.
사마천에 따르면 공자는 아버지 숙량흘(叔梁紇, ?~B.C. 548)과 어머니 안씨가 들에서 관계를 맺어 태어났다고 한다. ‘들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한자로 ‘야합(野合)’이라 한다. 오늘날에도 야합은 비정상적인 관계 맺음을 비판하는 말로 쓰인다. 일흔 살의 노인이 열다섯 살의 처자와 들에서 관계를 맺었으니 정상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공자의 탄생 설화는 역으로 그의 위대함을 부각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설화에서는 영웅이나 성인이 흔히 비정상적으로 탄생하곤 한다. 비정상적으로 태어났지만,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업적을 이룬다는 것이 설화의 주 내용이 된다.
공자의 일생이 그랬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모자의 삶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공자가 15~16세 때 세상을 떠나 공자는 완전히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런데도 공자는 열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서른 살에 자기 사상을 이룩했다고 자부했다. 요즘 말로 하면 ‘천재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자는 부모 없이 홀로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공자는 누구에게서 학문을 배운 것일까? 알 길이 없다. 공자는 스승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후세의 유학자들 역시 공자의 스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공자는 특정한 스승을 둘 만한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무엇을 공부했는지는 알 수 있다. 공자는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역사(歷史) 등 육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역으로 말하면,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육예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육예와 관련한 마땅한 교재는 없었다. 오히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교재를 만들었다. 그는 입으로 전해오는 것들을 정리하여 교재로 사용했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공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내용을 들으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스승이 필요했다. 그러나 특정한 스승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분발해야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듣고 배워야 했다. 그리고 시대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색했다. 이렇게 자득하여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이룩했다.
공자는 최초의 대중 교사였다.
공자는 중국 최초의 선생이자 유세객이었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왕이나 벼슬아치가 아니면 모든 백성이 농업이나 상업, 또는 공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공자는 벼슬아치가 아니면서 생업에 종사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가르치는 일만 했다. 물론 공자는 벼슬을 한 적도 있고, 또 벼슬을 열망하기도 했다. 그는 젊었을 적에 노나라의 말단 직책을 맡은 적이 있다. 노나라는 공자의 고향으로, 오늘날 중국 산둥 성 취푸의 동남쪽에 있는 제후국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창고지기, 가축 사육 등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부터 말단 직책을 던져버렸다. 대신 원대한 꿈을 안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를 춘추시대(B.C.770~B.C.403)라고 한다.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였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역시 그런 제후국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제후국 중에는 고을 수준의 면적을 가진 곳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공자는 제, 진(晉), 채, 초, 진(陣)과 같이 나라라고 부를 만한 규모가 되는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제후들을 만났다. 제후들을 만난 목적은 벼슬자리였다. 공자는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고위 직책을 원했다. 그는 제후를 도와 나라를 운영하여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그런 직책을 얻으려면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여 제후를 설득해야 했다. 일종의 면접시험을 보아 합격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을 하고 다닌 사람을 유세객이라고 한다. 공자는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유세객이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사마천의 시대에 공자는 대단히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가 죽은 뒤의 일이고 살아생전 공자는 제후들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무려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찾아다녔지만 ‘상갓집 개’ 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장례를 치러야 하는 집에서 개에게 신경이나 쓰겠는가. 공자는 탄식했다. “만약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으면, 그 나라는 1년 동안에 자리가 바로잡힐 것이고, 3년이면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특정한 생업 없이 전국을 다니게 되면 생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다행히 공자에게는 제자가 많았다. 제자가 무려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제자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공자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공자가 제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자신의 사상을 이룩했다고 말한 서른 살 무렵부터였다. 그런데 모든 제자가 사상을 배우기 위해 공자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의 대다수는 벼슬을 하기 위한 기초 지식을 얻으려 했다. 3,000명의 제자 중 공자의 사상에 정통한 제자는 70여 명에 불과했다는 것이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글자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글자만 깨쳐도 작은 벼슬이나마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제자가 3,0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공자가 재산과 신분과 관계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포(脯) 한 속(束) 이상을 가지고 와서 가르침을 청하면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포’는 얇게 썰어 말린 고기를 말한다. 육포를 생각하면 된다. ‘한 속’이란 10개를 말한다. 쉽게 말해, 육포 10개만 가져오면 제자로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최초로 ‘대중 교육’을 실천한 스승이 되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제후를 보좌하는 직책을 맡거나 높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제후를 직접 가르친 제자도 있었고, 유력자들과 사귀며 가르친 제자도 있었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공자는 비록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공자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중국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발전했다. 공자는 높이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고 그의 사상을 실현하려는 나라들의 역사가 2,000년 이상 이어졌다.
공부는 최고의 기쁨이다.
그러면 공자의 사상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추앙받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를 봐야 한다. 《논어》의 중심을 이루는 말을 꼽으라면 학(學)과 인(仁)이다. 그 두 단어가 공자 사상의 핵심이다. 공자는 학, 즉 공부를 매우 중요시했다. 《논어》의 첫머리를 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수시로 익힌다면 기쁘지 않겠느냐!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느냐!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세 가지를 얘기했다. 얼핏 보면, 서로 관련 없어 보이지만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먼저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것’, 즉 공부가 최고의 기쁨이라고 했다. 공자는 배움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일찍이 온종일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으면서 생각해 보았으나, 유익함이 없었으니, 배우는 것만 못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까 등등. 우리가 흔히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아무리 해봐도 답이 없는 몽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무엇을 하려고 하든 공부가 먼저다. 따라서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만나서 기쁜 벗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자. 한동네에 살던 옛 친구일까? 아니면 이래저래 알게 된 술친구일까? 그렇지 않다. 공자는 친구의 중요성 또한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한 예로 공자는 《논어》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벗으로 삼는 일이 없다”라고 했다. 그 친구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키우려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벗이란 함께 공부한 친구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때를 생각해 보라. 동창생은 함께 고민하며 공부했던 친구다. 그래서 서로 격의 없고 적절한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니 함께 공부한 벗을 만나면 기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공부하는 자세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 아는 것을 자랑하고자 공부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는 것을 자랑하고자 한다면 남들이 몰라줄 때 실망하게 된다. 심지어 화가 나기도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옛날에 공부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했고,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한다”라고 했다. 공부는 자기를 위한 것, 즉 자기 자신을 충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이름이나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기 자신의 충실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공자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군자(君子)’라고 했다.
이상과 같이 공자는 공부의 중요성, 공부하는 목적과 자세를 알려주었다. 또한, 공자는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책을 읽기만 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속기 쉽고,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책을 읽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책에서 배우든 선생에게 배우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배운 것에만 머무른다. 배운 것을 두고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배운 것이 진정으로 자기 것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공부의 방법이다.
공자의 사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하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공부야말로 최상의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례’ 하여 평화를 되찾자.
그렇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했다. ‘도’는 동아시아 철학에서 최고의 이상 혹은 최상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철학자들은 도를 추구했는데, 그 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서로 달랐다. 공자는 ‘인(仁)’이 곧 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이란 무엇인가?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라고 했다. 여기에 덧붙여 “하루라도 극기복례 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올 것이다”라고도 했다. ‘극기복례’란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루만 극기복례 해도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니 무슨 말인가? 이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우선 ‘복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핵심은 ‘예’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임방이 예의 근본에 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일반적인 예의 경우에는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편이 낫고 상례(喪禮)의 경우에는 형식과 절차를 빈틈없이 챙기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마음속으로 크게 애통해하는 편이 더 중요하니라.”
결혼식이나 장례식과 같은 형식이나 절차를 두고 예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나라의 제도’를 두고 예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반화하면, 공자는 유형무형의 규범을 예라고 했던 셈이다. 따라서 예로 돌아가라는 복례란 정해진 규범을 잘 지키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복례에 공자의 고민과 시대적 통찰이 담겨 있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주나라가 있었음에도 제후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서로 다투었다.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을까? 주나라가 약화하였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1046년에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무왕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왕족과 공신들에게 땅(봉토)을 나누어주고 다스리게 했다. 왕족과 공신들은 봉토를 다스리는 제후가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주나라가 약화하였다. 기원전 771년에는 견융의 침략을 받아 수도가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주나라가 약화하자 제후들이 앞을 다투어 나라의 독립을 선포했다. 200여 개의 제후국이 출현했고 춘추시대가 시작되었다.
제후들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워낙 많은 제후국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하루도 그칠 새가 없었다. 전쟁이 계속되자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했다. 공자는 춘추시대가 시작된 지 200여 년이 지났을 무렵에 태어났다. 200년 이상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러한 시대의 핵심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되찾는 일이다. 공자의 복례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복례에서 예는 주나라의 규범을 의미했다. 제후들이 주나라의 규범을 존중하고 따른다면 서로 다투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춘추시대 이전같이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판단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의 규범을 중시했다고 해서 복고적이라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를 되찾아 백성의 삶을 안정시킬 길을 찾아야 했다. 다른 방법을 찾기는 어려웠다. 가령 한 제후국을 키워서 중국을 재통일하려는 시도는 전쟁의 계속을 의미할 뿐이었다.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고 제후들의 동의를 받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즉각적인 평화가 필요했다. 복례는 공자의 고심과 통찰의 산물이었다. “하루만이라도 복례를 하면 인이 이루어진다!” 이토록 공자는 평화를 갈망했다. 복례는 평화를 향한 ‘신의 한 수’였다. 따라서 ‘복례론’은 평화 사상이었다.
군자가 되려면 ‘극기’하라.
이제 ‘극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복례를 하려면 극기해야 한다고 했다. 극기란 자기를 극복한다는 말이다. 누구에게 한 말인가? 바로 제후들에게 야망을 버리라고 한 말이다. 중국의 패자가 되겠다는 제후들의 야망은 제후 자신만을 위한 욕망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설득하기 위해 공자는 주공(周公)을 성인으로 칭송했다. 주공은 학문이 출중했던 인물이 아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극복해낸 영웅도 아니다. 그런데 왜 공자는 주공을 성인이라고 했을까?
주공은 무왕의 동생으로, 주나라가 은나라를 정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래서 공자가 태어난 곳인 중국 산둥 성 취푸 일대를 봉토로 받았다. 그러나 주공은 아들을 그곳으로 보내고 자신은 조정에 남아 무왕을 도왔다. 무왕이 죽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주공은 조카를 도와 주나라 안정에 이바지했다. 달리 말하면, 주공은 봉토를 다스리는 제후의 욕망을 버리고 주나라에 충성했던 인물이다. 공자가 주공을 성인으로 칭송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제후들에게 주공처럼 욕망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공자의 논법이다. 공자는 역사를 시대의 필요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교훈을 주는 방식을 취했다. 공자가 지었다는 역사서인 《춘추》가 대표적이다. 공자는 구전되던 역사를 기록하면서 옳고 그름을 가려 교훈서가 되게 했다. 공자는 또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한 예를 보자. “군자는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그것을 남에게서 찾는다”라고 했다. 공자는 극기를 군자의 행동과 결부 지었다. 감성적 호소인 셈이다. 누가 군자가 되고 싶지 소인이 되려 하겠는가.
공자가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하지만 사실 극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한사코 자기 욕심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제후들은 그 누구도 자기 욕망을 버리지 않았고 공자는 그들에게 ‘상갓집 개’ 취급을 당했다. 오늘날이라고 달라졌을까.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왔던 인물들을 생각해 보라. 흠결이 많은데도 ‘아니다’, ‘모른다’며 버틴다. 자리 욕심 때문에 후안무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욕심만 버린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후보를 사퇴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기복례의 아주 간단한 사례다. 공자 역시 극기의 어려움을 알았다. 그래서 극기와 관련해서 수많은 말을 쏟아내야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말을 들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한 가지로써 그 전체를 꿰뚫고 있느니라.” 증자가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다른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무슨 뜻이지요?” 증자가 말했다. “우리 선생님의 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충(忠)과 서(恕)일 따름입니다.”
충과 서가 공자의 도인 인의 핵심이라고 했다. 충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마음이다. 어떤 일에든 지극한 정성으로 임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면 서는 무엇인가? 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존재임을 알고 자기를 대하듯 대하는 마음을 말한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욕심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충하다고 극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욕심을 부리면서도 자기에게 충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자인 자공(子貢, B.C. 520~B.C. 456)이 “평생 받들어 행할 한마디의 말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그것은 아마도 서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여 서에 관해 설명하기를,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공자는 극기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저 인자(仁者)란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남들도 서게 하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남들도 이루도록 한다. 가까이 있는 것, 즉 자신의 마음이나 몸에서 유추하여 그것을 남에게 미치게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곧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인자, 즉 극기한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를 말했다. 충과 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남들도 서게” 하려면, 먼저 자기가 충실해야 한다. 도둑질하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함께 도둑질하자고 해서야 되겠는가. 자기가 충실해야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유추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