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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3. 2016

03. 평범한 이웃에게 바치는 존경과 사랑

<미술, 세상을 바꾸다>

1980년 《타임스 스퀘어 전Times Square Show》 카탈로그에서 존 에이헌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에이헌의 작품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초상을 조각으로 만들어 보이고 있었다. 제작방식으로 보자면 이른바 실물뜨기, 즉 인체에 석고를 부어 거푸집을 만들고 거기에 합성수지로 캐스팅하고 채색한 조각으로 새로울 것이 없는 기법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의 생생함과 현실감이 내 눈을 찌를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에이헌이 토레스와 함께 사우스 브롱스 명예의 전당을 제작하고 있다, 2012.

또한 작품들은 미술관이 아닌 아파트나 길거리의 벽에 걸려있었다. 당시 내가 알던 미술품들은 모두 화랑이나 미술관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아파트의 벽에 걸려있으면서 그곳을 지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었다.


아파트 벽에 설치된 작품들

<줄넘기>, 아래에서 줄넘기하는 아이들, 1981~1982
<줄넘기>, 아파트 벽면에 설치, 1986년에 재설치


<도슨가 사람들>, 아파트 벽에 설치, 1982~1983


에이헌은 아파트 벽에 이웃 사람들의 초상을 설치했다. 첫 번째가 <우리는 가족>, 두 번째가 <줄넘기>, 세 번째가 <도슨가 사람들>이다. 이 작품의 모델들은 에이헌의 집 옆에 있는 바에서 만난 사람들이며 아이들은 그 바텐더의 자녀들이다. 이 술집에서 에이헌과 토레스는 이웃 사람들과 어울렸고, 그 사람들의 초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유명해진 작품 <개학하는 날>을 설치했다. 벽에 초상을 설치하는 작업을 할 때의 심경을 에이헌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Dialogues in Public Art』, 2000, 88쪽)

앞의 두 작품을 설치할 때, 나는 마치 마르틴 루터가 교회당 문에 자신의 선언문을 써 붙일 때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내 작품을 올린다. 이것이 미술에 관한 나의 선언이다. 나의 신념이다.’ 그런데 세 번째 작품을 설치할 때는 내가 하는 일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선언 그 자체보다도 선언을 실천해가는 일에 관해서 말이다. 나는 혼란에 빠졌었다. 당시 나는 여기서 하는 조각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하던 일로 되돌아오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웃들을 위한 일을 하자고 다짐했다. <개학하는 날>을 작업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미술계를 잊어버리자고 다짐했다. 그제서야 내가 지역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은 학교에서 바라보게 계획되고 설치됐다. 작품을 벽에 설치하는 날 우리는 동네잔치를 열었다.

1980년에 참가한 《타임스 스퀘어 전》에서 만난 화상 브룩 알렉산더는 에이헌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거절 당했다. 뜻밖이었다. 화가들이 화상을 붙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잘 아는 그로서는 의외였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조심스레 쌓아온 브롱스 사람들과의 관계가 상업화랑에서의 전시와 작품매매로 손상될 수 있다는 에이헌의 염려를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에이헌은 특별한 조건을 제시하며 브룩 알렉산더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했다. 에이헌의 요구는 휴가철인 7월에 전시일을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대부분의 화랑이 문을 닫는 시기여서 의아했으나 이유는 간단했다. 먹고 살기 바쁜 사우스 브롱스 사람들이 전시회에 올 수 있는 시기로 그때가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에이헌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염려를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듀안과 알>, 1982


그로부터 3년 후, 에이헌은 특별한 조건을 제시하며 브룩 알렉산더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했다. 에이헌의 요구는 휴가철인 7월에 전시일을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대부분의 화랑이 문을 닫는 시기여서 의아했으나 이유는 간단했다. 먹고 살기 바쁜 사우스 브롱스 사람들이 전시회에 올 수 있는 시기로 그때가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에이헌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동네축제와 함께 열린 전시 <개학하는 날>을 둘러보는 사람들, 1985


주민들과 함께하는 미술작업인 경우, 작가가 그들을 이용해먹을 수 있다는 잠재적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순수한 일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승리를 쟁취하지 않는다. 몬드리안 같은 작가는 결코 사람들을 이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작품처럼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업은 그들을 이용해먹을 위험성이 그만큼 크다.

《타임스 스퀘어 전》 직후 에이헌은 아예 자신의 집을 사우스 브롱스의 월턴 애비뉴로 옮겼다. 그곳 사람들과 명실공히 이웃이 된 것이다. 당시 그 동네에 사는 백인이라고는 달랑 두 가족뿐이었다. 그가 들어간 집은 토레스와 가족들이 살고 있는 허름한 빌딩의 위층이었다.

그 동네로 이사와서 처음 만난 친구는 레이먼드 가르시아였다. <레이먼드와 토비>의 모델로 에이헌의 작품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가르시아는 그가 항상 끌고 다니던 개의 캐스팅도 허락했다. 나중에는 그의 가족 모두가 모델이 되어 <프레디>, <차 도장하는 사람>, <티티 콘챠> 등이 탄생했다.

가르시아는 마약을 거래하고 때론 자신도 사용했으므로 감옥에 드나드는 경우가 빈번했다. 에이헌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언제나 마약이 문제였다. 한번은 마약에 취한 가르시아가 도끼로 문을 부수고 에이헌의 집에 뛰어들어 침대를 내리친 후 경찰에 전화를 걸어 에이헌을 죽였다고 신고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경찰은 이를 에이헌의 쌍둥이 형제 찰리에게 알리고, 그와 함께 사이렌을 울리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다행히 그때 에이헌은 집에 없었다.

동네 사람이 다 아는 백수에다 전과도 있는 가르시아를 모델로 한 <레이먼드와 토비>는 청동으로 만들어 전철역 앞 공원에 세워졌으나 논란 끝에 철거됐다. 조각상이라면 뭔가 교훈적인 일을 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 주민 자치위원장의 생각이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 전설적인 운동선수 베이브 루스나 마이클 조던 등 흑인 세계에서 주목받는 삶을 산 사람의 초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이헌은 그런 위대한 인물뿐만 아니라, 주민들 바로 당신들이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존경받을수 있는 인물임을 역설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회의를 통해 모범적 인물이 아닌 말썽쟁이 레이먼드의 초상은 세울 수 없다고 결정했다. 에이헌은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그 작품들을 철거했다.

왼쪽에 개와 함께 있는 조각상이 <레이먼드와 토비>, 브롱스의 공원에서 철거되어 퀸스의 소크라테스 조각공원으로 옮겨졌다.


브롱스 조각공원에 설치하기 위한 계획도. 왼쪽부터 <레이먼드와 토비>, <델리시스>, <코리>, 1991


이 사건은 미술계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예술가의 공공작품이 주민들의 요구로 철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그와 비슷한 일이 맨해튼의 리처드 세라의 작품에서도 일어났다. 1981년 뉴욕 시 제이콥 제이비츠 연방 빌딩에 세워진 <기울어진 호>란 조각은 주민들의 철거 요구가 법정까지 갔고, 결국 1989년 철거됐다. 하지만 이 둘은 성격이 다른 문제이다. 세라의 작품은 사람들의 통행과 시선에 직접적으로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고, 에이헌의 작품은 모델의 성격, 또는 도덕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아무튼 이 일로 존 에이헌의 이름은 한동안 미술계의 화제로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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