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평전>
사임당은 19세가 되는 1522년 꽃가마를 탄다. 열아홉 살 아리따운 사임당을 아내로 맞게 된 이는 세 살 위인 이원수(李元秀, 1504~1561)였다. 이원수의 본관은 덕수(德水)로 고려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로부터 12대손이며 천(蕆)의 아들이다. 고려 시대에는 무관으로 이름을 떨친 집안이며, 조선 시대 이르러서는 문관으로 이름을 떨친 이들이 많은 집안이었다.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545~1598)도 같은 조상인 덕수 이씨로 실제 18촌 동행 간이다.
이원수의 어릴 적 이름은 난수(蘭秀)였으나 뒤에 원수로 고쳤고 자는 덕형(德亨)이라 불렀다. 이원수의 아버지 천(蕆, 1483~1506)은 성종 14년(1483년)에 출생하여 연산군 12년(1506년) 24세 때 세상을 떠났기에 이원수는 6세 때 아버지를 잃고 독자로 자랐다. 따라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한 관계로 학문이 그다지 깊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히려 사임당과 혼인 후 사임당에게서 듣고 배워 깨달음이 많았다고 전한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덕수 이씨 이기(李芑, 1476~1552), 이행(李荇, 1478~1534)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를 사위로 정할 때 주변에서는 사윗감을 볼 줄 모른다며 이상하게 봤다고 한다. 두 당숙이 영의정과 좌의정 등을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그에 비해 이원수는 학문이 깊지도 않았고, 그러니 이렇다 할 관직도 없었다. 거기에다 집안 형편까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주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명화가 사임당의 사위를 고를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도와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사윗감을 찾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타고난 재능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자신의 딸을 혼인이라는 이유로 그 재능을 가둬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가로서의 길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사윗감이 누구일까 하는 점이 아버지 신명화의 최대 관심사였을 것이다.
율곡이 지은 「선비행장」에 의하면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사위 이원수에게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질 않더니 그대의 처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라고 말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여러모로 재능이 출중한 딸을 보내기 싫었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둘째 사위에게 처가살이를 제안했고, 이원수는 장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언급했듯이 남귀여가혼의 풍습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이원수의 처가살이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임당의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으로 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친정에 머무르며 학문과 예술 세계를 더 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 신명화의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신명화는 사임당이 혼인한 지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1월 7일,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항상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를 잃은 사임당은 강릉에서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혼인한 여자의 몸으로 삼년상을 치른다. 아직 신혼례도 드리지 못한 새색시가 친정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다는 것은 고려 시대의 유습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조선 사회에서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사임당이 서울에 계신 시어머니 홍씨 부인에게 신혼례를 드린 것은 결혼 후 3년 만의 일이었다. 사임당은 시어머니 홍씨 부인에게 친정에서 배워서 익힌 그대로 진정으로 효를 다하였다. 율곡의 「선비행장」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혼을 치른 지 얼마 안 되어 진사가 작고하니 상을 마친 뒤에 신부의 예로서 시어머니 홍씨를 서울에서 뵈었는데,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 아버지께서는 성품이 자상하지 않아 집안 살림에 대해 잘 모르셨다.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는데 자당이 절약하여 윗분을 공양하고 아랫사람을 길렀는데 모든 일을 맘대로 한 적이 없고 반드시 시어머니에게 고하였다. 그리고 홍씨의 앞에서는 희첩(姬妾: 시중드는 여종을 모두 희첩이라 했음)도 꾸짖는 일이 없고 말씀은 언제나 따뜻하고 안색은 언제나 온화했다.”
항상 사소한 일에도 예에 어긋남이 없이 효행을 실천한 어머니 사임당의 모습이 어린 율곡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같이 신사임당이 신명화의 삼년상을 벗은 21세에 서울 시댁으로 올라오긴 했으나 그대로 서울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서쪽으로 50㎞쯤 떨어진 파주 율곡리에서도 살게 된다. 이곳은 이원수의 선조 때로부터 내려오는 오랜 터전이며 세거지지(世居之地)였기 때문에 뒷날 율곡도 늘 이곳에서 기거하였고, 그래서 별호조차 ‘율곡(栗谷)’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임당은 시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시댁에 들어가 산 것도 아니고, 파주 율곡리에서 별도로 기거했을 뿐만 아니라 강릉 친정에도 자주 내려가 기거했기 때문이다.
또한, 봉평 판관대에서도 수년을 살았다는 기록도 전하는데, 이곳은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의 벼슬이 수운판관이었고, 이원수와 사임당이 살았던 집터라고 해서 판관대라 불리고 있다. 사임당이 33세를 전후해서 수년간 살았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사임당은 약 20년간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다. 신명화의 바람대로 사임당은 혼인 후에도 학문과 예술 활동에 비교적 자유롭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사임당이 혼인 후에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시어머니 홍씨 부인의 배려도 있었고, 친정살이의 풍습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남편 이원수의 배려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남편 이원수는 유교 사회에서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권위를 부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남성의 권위를 내세우고 여성의 의무만을 강요하는 사람이었더라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은 아마도 ‘한(恨)’이라는 단어에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임당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음은 분명하다.
우암 송시열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일화로 사임당의 산수화에 전하는 송시열의 발문을 보면, “일찍 듣건대 부인이 강릉에서 서울로 신행 오던 날 참찬공(부군 이원수)이 손님들에게 부인의 재예를 보이려고 그림 한 장을 그리라고 청했을 때 부인은 처음엔 못내 난색을 보이다가 사람을 보내어 재촉함에 미쳐서야 계집종을 시켜 유기 쟁반을 가져오게 하고 거기다 간략히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그려 바쳤더라 하는데 대개 그 뜻인즉 만일 종이에나 비단에다 그린다면 반드시 남들이 그것을 가지고 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테니…….”라는 내용으로 보아 사임당의 재능을 널리 자랑하고 싶을 만큼 인정했음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