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Sep 19. 2016

04. 상처를 치유하는 조형물

<미술, 세상을 바꾸다>

반대 여론을 딛고 일어서다


보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상처를 입고 귀국한 잰 스크럭스는 이 전쟁이 환영받기는커녕 많은 국민에게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미국의 여론은 월남전을 두고 찬성파와 반대파로 양분돼있었고 전국적으로 극렬한 반전시위와 참전옹호시위가 동시에 일어났다.

1975년, 미국은 국내외 여론과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월남에서 발을 뺀다. 그것은 미국이 역사상 최초로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다.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와 16년 동안 치른 전쟁의 상처는 컸다. 약 900만 명이 동원됐고, 270만 명이 전투지역에 투입됐으며, 30만 명이 부상했고, 7만5천 명이 불구자가 된 전쟁. 약 6만 명이 사망했거나 실종된 전쟁.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른 후에도 미국은 남북전쟁 이래 가장 극렬하게 국론이 분열돼있었다.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쪽과 명분 없는 전쟁은 당장 그만둬야 한다는 쪽이 팽팽하게 맞섰다. 후유증도 컸다. 70년대 말에는 뉴욕 시 노숙자의 70퍼센트 이상이 월남 참전용사라는 보고도 있었다.

월남 철수 후, 월남전 문제는 폭탄처럼 위험한 것이어서 아무도 나서서 건드리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속됐다. 1979년, 월남전 문제를 처음으로 다룬 영화 「디어헌터」가 상영됐다. 잰 스크럭스는 그 영화를 본 후, 결심했다. 상처는 치유돼야 한다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참전용사 기념비가 세워져야 한다고.

1979년 5월, 그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의견을 모아 월남 참전용사 기념비설립위원회를 만들었다. 자신의 주머니에서 출자한 2,800달러로 일을 시작했다. 첫째 목표는 기념비 건립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기념비를 세울 부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오랜 설득 끝에 마침내 연방정부로부터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근처의 땅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1980년 7월, 지미 카터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그다음 달인 8월, 위원회는 기념비 작품공모를 발표했다. 작품에 대한 요구사항은, 첫째 기념비가 세워질 장소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충분히 숙고할 것, 둘째 기념비에 참전용사의 이름을 새겨넣을 것, 셋째 월남전에 대한 정치적 견해 표현이 없을 것 등이었다.

상금은 5만 달러. 공모 결과 전국에서 1,421명이 응모했다. 응모작들은 심사를 위해 완전히 봉쇄된 가운데 앤드루 공군기지에 펼쳐졌다. 8명의 심사위원(3명의 조각가, 1명의 도시설계 및 구조전문가, 2명의 조경건축가, 2명의 건축가)들이 심사한 결과 응모번호 1026번이 최종 결정됐다. 마침내 1981년 5월 1일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뜻밖에도 작가의 이름이 매우 낯설었다. 마야 잉 린. 21세, 중국계 이민 2세, 예일 대학교 건축과 4학년에 재학 중, 막 틴에이저를 벗어난 여학생이었다.

당선작이 설계도와 함께 발표되자마자 반대 여론이 불같이 일어났다. 기념비가 참전용사들을 모욕한다는 것이었다. 왜 조국을 위해 용감히 싸우는, 멋지게 전진하는 모습의 용사상이 없냐는 것이었다. 왜 기념비가 하늘을 향해 웅장하게 서 있지 않고 여성의 성기처럼 땅을 가르며 있냐는 것이었다. 반대파들은 기념비를 두고 ‘검게 째진 치욕의 상처’라고 빈정거렸다. 응모작 중 미국적 진취성이 빛나는 작품은 버리고 왜 하필 그따위 우울한 작품을 선정했냐는 항의가 빗발쳤다. 작가의 신원도 시빗거리가 됐다. 아시안이고, 21살밖에 안 된 애송이, 월남전을 모르는 여학생의 작품이라는 것도 논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잰 스크럭스를 비롯한 위원회는 마야 린의 당선작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하지만 반대 여론도 거셌다. 반대하는 사람 중엔 영향력 있는 상・하원의원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기념비 한가운데에 국기 게양대를 만들고, 참전용사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크럭스는 이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기념비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용사상과 국기 게양대를 단독적으로 세우는 선에서 의견은 절충됐다. 마야 린의 디자인을 건드리진 않은 것이다.


상처를 치유하는 조형물

1982년 11월 13일, 마침내 <더 월>이 완성되어 헌정식을 했다. 막을 걷고 모습을 드러낸 그 검은 벽은 일순간에 반대 여론을 잠재웠다. 반대 의견은 씻은 듯 사라지고,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울고 기도했으며, 추억의 물건들을 가져다 두었다. 기념비의 새로운 문화가 생기고 있었다. 기념비는 홀로 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몸을 비비고 그들과 함께 숨을 쉬었다. 그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고, 만지고, 뺨을 부비는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고 있었다.


벽 앞에 선 사람들은 거기에 새겨진 이름, 이미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을 떠올린다. 동시에 그 벽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죽은 자와 산 자를 동시에 보게 되는 것이다. 작가 리사 그룬월드는 거울처럼 비치는 기념비의 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벽은 참으로 우리를 한몸이 되게 한다. 이 벽은 아이들과 그들의 죽은 아버지의 친구와 한몸이 되게 한다. 때로 이 벽은 전쟁에서 싸운 사람들과 그 전쟁에 반대해 싸운 사람들을 한몸이 되게 한다. 그리고 이 벽은 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을 되비침으로써 현재와 과거가 한몸이 되게 한다.


한 참전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곳에 앉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나는 거기에 그들이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했다. 나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내 삶의 고통의 한 부분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낀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모두 거기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어떤 죄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1984년에는 절충안으로 제시되었던 <3인의 용사상>이 섰다. 그리하여 기념비가 명실공히 완성되었다. 공모전에서 3등으로 선정된 프레더릭 하트의 이 청동 조각상은 전쟁에 참여한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의 각 인종을 나타내고 있다. 이 기념비는 전국의 27만5천 명이 참여해 모금된 9억 달러로 조성됐다. 연방정부의 도움 없이 일반 국민의 성금만으로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3인의 용사상>, 청동, 1984. 미국 국민의 주 구성원인 백인, 흑인, 히스패닉의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기념비를 방문하는 사람은 매해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2004년에는 440만 명이나 다녀갔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기념비를 방문한 사람은 6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 기념비를 보고 싶지만 보기 어려운 사람들, 특히 여행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 크기를 축소해 세 개의 순회기념비가 만들어졌다. 이 복제기념비는 이동의 편의를 위해 검은 화강암과 동일한 느낌을 주는 플라스틱으로 각각 원본의 80퍼센트, 3/5, 3/4의 크기로 만들어져 전국을 순회하고 있다.

잰 스크럭스는 기념비의 성공으로 유명인이 됐다. 그는 기념비 건립과정을 『나라의 치유를 위하여(To Heal a Nation)』라는 책으로 썼다. 이 내용은 1988년 NBC-TV에 드라마로도 방송됐다.

마야 린은 이 작품 하나로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92년 기념비 건립 10주년 식장에서 그녀는 10년 전과는 달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기념비는 감정과 생각을 갖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 즉 여기에 계신 바로 당신들을 위해 설계됐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와서 이 기념비를 살아있게 한다”라고 말했다.

(위로부터)기념비를 설계한 마야 린의 작품 진행과정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상, 작가 마야 린의 최근 모습. 2008.


1995년에 제작된 필름 「마야 린-A Strong Clear Vision」은 그해 다큐멘터리 부문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여기에는 중국계 2세, 어린 여성 작가의 작품이 모든 반대 여론과 갈등을 극복하고 세워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그녀는 너무 일찍 유명해져 오랫동안 심리적 부담을 안기도 했으나 1998년 흑인 인권운동과 마틴 루서 킹 목사를 기념하는 <Civil Rights Memorial> 제작에 이어 뉴욕 시와 예일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에 공공미술품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2007년 미국 건축가협회로부터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건축물 10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수직구조에서 수평구조로

월남전 기념비는 미니멀리즘이자 개념미술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 미학의 끝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하는 단계의 작품이다. 그래서 이 기념비는 난해하고 어려워 일반인에게 외면당했던 모던아트가 어떻게 일반인들과 어우러져 감동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다.

이 기념비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자, 관람객으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을 꼽자면 먼저 전통적 기념비의 남근성을 탈피한 것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남성적, 권위주의적 구조물 대신 관객과 같은 눈높이에서 수평으로 펼쳐지는 여성적, 모성적 친화력이 작품의 특징이다. 그리하여 관객은 그 앞에 서서 볼 수 있고, 손을 뻗어 거리낌 없이 만질 수 있고, 몸을 기댈 수 있으며, 거울처럼 벽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볼 수 있다.



“이 벽은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한다. 이 벽은 전쟁에서 싸운 사람들과 그 전쟁에 반대해 싸운 사람들을 한 몸이 되게 한다. 그리고 이 벽은 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을 되비침으로써 현재와 과거가 한 몸이 되게 한다.” - 리사 그룬월드


그리고 거기에는 과장된 포즈의 상투적 영웅상이 없다. 그 대신 검은색으로 빛나는 화강암 벽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다. 기념비에 전몰용사의 이름을 새김으로써 그 이름이 지닌 개인과 집단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이름이라는 문자가 지닌 개념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산 자는 죽은 자의 이름 앞에서 기도하고 울고 생각에 잠긴다. 그들이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얼굴뿐만은 아니다. 인간 존재의 사랑과 증오, 국가 간의 이기주의, 그리고 전쟁이라는 비극과 그 불합리함, 나아가 인류의 역사와 미래까지도 생각하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03. 사임당의 재능을 사랑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