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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9. 2016

04. 사임당의 임종, 유기그룻이 붉게 물들다.

<사임당 평전>

이원수가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사임당의 애를 많이 태웠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있다. 신사임당은 남편의 학문 공부를 건의하며 10년 별거를 약속한다. 그러나 명산을 찾아 학문에 정진키 위해 떠난 이원수는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돌아오고, 또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타일러 보내기도 하고, 결단력 없는 남편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의지가 약한 남편은 학문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아 마침내 사임당은 가위를 꺼내 들고 남편의 학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후 이원수는 학문 공부를 위해 떠났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약속했던 10년 공부는 3년 만에 접고 만다. 결국,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음서(蔭敍)로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하게 되니 의지가 약한 남편을 바라보는 사임당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이원수에 대한 기록은 율곡의 「선비행장」과 『견첩록(見睫錄)』, 그리고 조선 후기 문신 정래주(鄭來周, 1680~1745)의 『동계만록(桐溪漫錄)』에도 전한다. 그 당시 사임당의 가정 풍경이 어떠했는지 그려 볼 수 있는 좋은 사료다. 

조선 시대 부인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장 큰 미덕으로 내세웠다. 남편의 말이 옳든 그르든 그것은 그다음 문제였다. 하지만 사임당은 달랐다. 먼저 조선 시대의 문물과 사회제도, 풍속 따위를 수록한 『견첩록(見睫錄)』의 일화를 살펴보자. 남편 이원수는 한때 덕수 이씨 문중에 있는 5촌 당숙 이기(李芑, 1476~1552)와 가까이 지냈다. 이원수가 이기의 문하에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된 사임당은 “저 영의정이 어진 선비들을 모해하고 권세를 탐하니 어찌 그 영광이 오래갈 리가 있겠소. 당신은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시오.”라고 하면서 세도가의 힘을 빌려 벼슬을 얻고자 하는 이원수에 대해 사임당은 이기의 집에 출입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기는 윤원형의 심복으로 명종 즉위년에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킨 뒤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 소윤 윤원형 일파가 대윤 윤임 일파를 몰아낸 사건이었지만 그로 인해 사림 100여 명이 숙청당하는 큰 화를 입었다. 이후 사림이 집권하자 이기는 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 초에는 훈작이 추삭(追削)되고 묘비도 제거되었다. 
     
이원수가 만약 사임당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이기의 집에 드나들었다면 아마 그 화가 율곡에게까지 미쳐 지금의 대학자로 이름을 남기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규방의 부녀자였지만 사임당은 당시 정계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로움과 단호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상의 악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이치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의롭지 못한 행위에 대한 사임당의 확고한 성정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효경(孝經)』 「간쟁장(諫爭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옛날에 천자는 간쟁하는 신하 일곱을 두면 비록 자신이 무도(無道)하다 하더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았고, 제후는 간쟁하는 신하 다섯만 두면 비록 자신이 무도하다 하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않았으며, 대부는 간쟁하는 신하 셋만 두면 비록 자신이 무도하다 하더라도 그 가정을 잃지 않았다. 선비에게 간쟁하는 벗이 있으면 그 몸에서 명성이 떠나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에게 간쟁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니라.”
   
이원수에게는 진정으로 간쟁하는 아내 사임당이 있었기에 불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간언을 할 때는 그 방법이 문제다. 잘못했다간 상대방 심기를 건드려 거꾸로 화를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조심스럽게 간언한다면 상대편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사임당의 진정한 간언이 이원수의 마음을 움직였음이다.
     
또 다른 책 『동계만록(東溪漫錄)』에는 자신의 사후(死後) 일까지 당당하게 간청하는 사임당과 이원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임당] 제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 우리가 이미 자녀를 7남매나 두었는데 또 무슨 자식을 더 낳아서 『예기(禮記)』에 가르친 훈계를 어기기까지 하겠는지요.
     
[이원수] 그럼 공자께서 자신의 아내를 쫓아낸 일은 무슨 예법에 합당한 일이란 말이오?
     
[사임당] 공자가 노(魯)나라 소공(昭公) 때 난리를 만나 제(齊)나라 이계(尼溪)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宋)나라로 갔기 때문에 내친 것이지요. 그러나 공자가 부인과 다시 동거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원수] 그럼 증자(曾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사임당] 증자의 부친이 찐 배(蒸梨)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소홀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를 존중하여 다시 새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이지요.
     
[이원수] 주자(朱子)의 집안 예법에도 이 같은 일이 있는가요?
     
[사임당] 주자가 47세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塾)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위의 대화 내용은 부부 사이에 오가는 일상의 대화라기보다는 사임당의 유언이라고 평가되는 글이다. 사임당이 이원수에게 “내가 죽더라도 새장가는 들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한 것을 보면 아마도 자신의 사후에는 이원수가 재혼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사임당은 예법과 자녀교육을 들어 남편의 재혼이나 외도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지만, 결국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원수는 나이가 어린 주막집 여인 권씨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고, 사임당 사후에는 그녀를 곧바로 아내로 맞아들였다. 자유분방했고 술주정까지 심했다고 전하는 권씨를 알고 있었기에 사임당의 속앓이는 심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아무리 조선 시대의 사대부가 첩을 들이는 일이 법에 어긋나는 행위는 아니었을지라도, 나이 어린 권씨에게 마음을 뺏긴 남편을 바라보는 사임당의 아픈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마도 사임당에게 혼인 후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어냐 묻는다면 남편 이원수라 답하지 않았을까 싶다.
     
앞의 두 일화에서 보듯이 사임당은 남편에게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조선 시대가 여성의 순종만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사회였을지라도 사임당은 달랐다. 남편이 실수하면 반드시 잘못을 지적했다고 한다. 율곡의 「선비행장」 기록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성품이 호탕하여 세간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는데 자당이 절약하여 윗분을 공양하고 아랫사람을 길렀는데 모든 일을 맘대로 한 적이 없고 반드시 시어머니에게 고하였다. (…) 아버지께서 어쩌다가 실수가 있으면 반드시 간하고 (…)”
   
「선비행장」의 기록만 보면, 율곡은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보다는 무능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고생시킨 아픈 기억이 대부분인 것 같다. 아버지의 타고난 성품이 우유부단하고 놀기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니 술도 즐겼을 것이고, 그러니 집안 살림에는 도통 관심도 없었을 것이니, 학문이 깊고 이치에 밝은 아들 율곡이 보기에 아버지의 행실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컸을 것이다.
     
율곡은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 외조모 이씨 부인의 행장, 외조부 신명화의 행장은 모두 기록했는데, 아버지 이원수에 대한 행장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너무 커서일까, 아니면 미움과 원망이 너무 커서일까? 여하튼 아버지에 대한 율곡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혹자는 이원수가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고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은 도량 넓은 남편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가정 상황은 돌보지도 않고 밖으로 돌며 첩까지 둔 것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남편을 대화의 장으로 이끈 이는 사임당일 것이다. 밖으로 도는 남편을 이끌어 집안일을 함께 의논하여 가장의 위신을 세워 주고, 자신보다 항상 남편을 앞세우고, 실수하는 일이 있어도 간곡히 청하여 바르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항상 보이지 않는 조언을 했을 것이다. 그리하는 것이 조선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부덕(婦德)임을 사임당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어머니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실천으로 보여준 가르침은 대를 이어 빛나고 있었다. 
     
근대의 역사학자이며 민속학자인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조선 부녀의 지식계급편」에 의하면 “이공의 학업이 허술하면 신씨가 이를 보태어 그 잘못을 깨달은 곳을 바로잡았으니 참으로 어진 아내였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원수는 50세 늦은 나이에 황해도 해주 수운판관이 된다. 그리고 그다음 해 51세 되던 해 여름에 큰아들 선(璿)과 셋째 아들 율곡과 함께 관서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배에서 세곡을 싣고 5월 17일에 서울 서강(西江)에 와 닿자, 바로 그날 새벽에 삼청동 자택에서 사임당 신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자가 모두 같이 애통해하였다.
     
사임당이 별세한 뒤 이원수는 10년을 더 생존해 있었는데 그동안에 벼슬은 내섬사 종부사(內贍寺 宗簿寺) 등의 주부(主簿)도 지냈고 또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도 역임하였다. 명종 16년(1561년) 5월 14일에 세상을 마치니 바로 61세 회갑 되던 해였다. 그해 9월에 파주 두문리 자운산 기슭에 먼저 돌아가 묻힌 부인 신사임당의 무덤에 같이 합장하였다.
     
그래도 이원수는 아내가 남편에 대해 의무만 지녔고 권리는 주장할 수 없었던 조선 시대에 아내 사임당의 생각과 재능까지 모두 존중한 후덕함은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일찍이 학문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다고는 하나 천성이 진솔하고 세상 물욕이 없었다. 이원수의 묘비명을 지은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93~1564)은 “자못 옛 어른의 풍도가 있었다.”라고 찬양했으며, 또 뒷날 백여 년 뒤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도 “신사임당 같은 어진 부인을 만나 율곡 선생 같은 큰 현인을 낳은 것은 그야말로 ‘좋은 술은 질그릇에 담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라.”고 하며 이원수의 숨은 덕(德)이 능히 저 어진 부인과 짝할 수 있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송시열은 율곡의 위상을 높여서 서인의 결속력을 다지려는 의도가 있던 인물이라 이원수에 대한 과한 칭송은 대학자 율곡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임당이 38세가 되던 해에 시어머니 홍씨가 늙어 더는 가사 일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사임당은 친정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 시댁 수진방(현재의 수송동과 청진동)으로 옮겨 와 살게 된다. 이곳에서 10여 년간 살게 되고, 그 후 다시 삼청동으로 이사하게 된다. 서울로 올라와 시댁 살림을 맡은 지 꼭 10년이 되던 명종 6년(1551년) 5월 17일 남편이 수운판관이 되어 아들 선과 율곡이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때 사임당의 나이 48세였다. 이 내용은 율곡의 「선비행장」을 통해 기록되어 있다.
     
“경술년(1550년) 여름에 가군(이원수)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었고, 신해년(1551년) 봄에는 삼청동 우사(寓舍)로 이사했다. 이 해에 가군이 조운(漕運)의 일로 관서에 가셨는데 이때 아들 선과 이가 모시고 갔다. 이때 자당은 수점(水店)으로 편지를 보내시면서 꼭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는데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다. 5월에 조운이 끝나 가군께서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는데, 당도하기 전에 자당께서 병환이 나서 겨우 2, 3일 지났을 때 모든 자식에게 이르기를, '내가 살지 못하겠다.' 하셨다. 밤중이 되자 평소와 같이 편히 주무시므로 자식들은 모두 병환이 나을 줄로 알았는데 17일(갑진) 새벽에 갑자기 작고하시니 향년이 48세였다. 그날 가군께서 서강(西江)에 이르렀는데 행장 속에 든 유기그릇이 모두 빨갛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한 일이라고 했는데 조금 있다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쓸 때 이미 사임당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과연 어떤 사람이 죽음 앞에 태연할 수 있을까. 그래도 사임당은 행복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잠시 잠깐도 게을리 살지 않아서 스스로가 대견했을 것이고, 그렇게 게을리 살지 않았기에 자신의 능력도 실현해 보이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어머니를 보며 일곱 남매가 너무나 잘 성장해 주었기에 사임당은 마지막 편지에 행복의 눈물을 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사임당은 후에 아들 율곡으로 인하여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다. 사임당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그녀가 우거(寓居)했던 봉평의 판관대, 파주의 율곡리, 그리고 묘소가 있는 자운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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