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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9. 2016

05. 신묘한 붓끝 따라 맑은 자취가 남다.

<사임당 평전>

16세기 사임당에 대한 칭송의 글은 여러 문헌에 전한다. 아들 율곡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율곡을 가르쳤던 스승과 율곡의 제자들까지, 또한 동시대에 사임당의 그림을 접했던 문인들까지 간략한 기록이나마 사임당의 당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전하고 있다. 율곡의 제자들에 의한 기록은 스승의 어머니를 기록한 부분이기에 내용이 대동소이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오이와 메뚜기」, 신사임당 | 48.6×35.9cm,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먼저 율곡의 「선비행장」 기록을 살펴보자.
     
“어려서 경전에 통했으며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다. 또 바느질도 잘하고 수놓기까지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천성도 온화하고 얌전했으며 지조가 정결하고 거동이 조용했다. 일 처리에 있어 편안하고 자상했으며 말이 적고 행실을 삼가며 또 겸손하였다.”
   
아들 율곡에게 있어 사임당은 어머니이면서 스승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의 행실 하나하나 어머니의 가르침 하나하나 마음에 새겨 표현한 「선비행장」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물봉선화와 쇠똥벌레」, 신사임당 | 48.6×35.9cm,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또한, 율곡의 수제자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22 이 지은 「율곡행장(栗谷行狀)」에 보면 사임당에 대하여, “신씨는 기묘명현 명화의 따님으로, 자품(資品)이 매우 특출하여 예에 익숙하고 시에 밝아서 옛 여범(女範)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金集, 1574~1656) 또한 김장생의 내용과 거의 유사하게 사임당의 빼어남을 율곡의 묘지명에 적고 있다.
     
당시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지은 율곡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도 “진사 신명화가 딸 하나를 특히 사랑하였는데, 총명이 뛰어나고 고금(古今)의 서적에 통달하며, 글을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다.”라고 칭송의 글을 기록하고 있다.
    

「가지와 범의 땅개」, 신사임당 | 48.6×35.9cm,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임당과 동시대를 살았던 어숙권은 사임당은 포도화와 산수화를 잘 그려 이미 세상에 그 이름이 높았고, 그래서 안견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고 있음을 『패관잡기』를 통해 전하고 있다.
     
동시대의 유명한 시인으로 뛰어난 문장을 자랑하던 소세양도 사임당의 산수 그림 족자에 붙인 시 말미에 “꽃다운 그 마음은 신과 함께 어울렸나니, 묘한 생각 맑은 자취 따라잡기 어려워라.”라고 썼고, 또 다른 산수 그림에서는 “알겠구나! 신묘한 붓, 하늘 조화 뺏었구나.”라고 칭송하고 있다. 여기에서 꽃다운 그 마음이나 묘한 생각, 맑은 자취는 사임당의 덕을 칭송했음이고, 신묘한 붓은 사임당의 그림 솜씨에 대한 칭송이다. 예술적 소양을 이미 갖추어 신(神)과 함께 어울리고 하늘의 조화를 빼앗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사임당의 산수화 경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맨드라미와 개구리」, 신사임당 | 48.6×35.9cm,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남성이 사대부가의 부인에게 쓸 수 있는 모든 칭송을 다 사용한 것 같다. 특히 소세양의 칭송은 율곡의 제자들이 남긴 몇몇 인사치레의 글이나 발문이 아니고 그 자신의 예술적 소양에 견주어 평가한 것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수박과 여치」, 신사임당 | 48.6×35.9cm,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또한,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백헌 이경석도 사임당의 산수 그림에 대해서 “털끝을 가려내도록 섬세하여 모두 붓 밖의 뜻이 있어 그 그윽하고 조용하고 단단하고 깊은 덕이 역시 저절로 그사이에 나타나 있으매 이것이 어찌 배워서 될 수 있는 일이겠냐. 거의 하늘이 주어 얻은 것이리라.”라고 적고 있다. 그림 솜씨는 물론 그녀의 덕까지 하늘이 내린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조선 시대가 여성의 예술적 재능은 잡기(雜技)로 취급했던 때임을 고려한다면 사임당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 이미 그림 솜씨는 물론 그림의 진정한 바탕이 되었던 덕까지 갖춘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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