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무기력을 이해하라.

<무기력의 비밀>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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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가 수잔 캐벌러-애들러(Susan Cavaler-Adler)는 무기력을 ‘더 이상 분노할 수 없을 때 보이는 상태’라고 해석했다. 혹은 ‘더 이상 분노가 소용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무기력한 채 지내는 것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즉, 아이들에게 무기력이란 더는 화도 안 내는 상태를 말한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무기력 현상들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는 아이를 깨워서 뭘 좀 하자고 하면 하지 않으려 한 다거나 못한다고 하거나 싫다고 하는 것. 더러는 ‘몰라요’만 연발하기도 하고 더 심각한 경우에는 그룹을 이뤄서 하는 모든 활동에 아예 참여를 안 하려고 든다. 자기는 해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고 다른 걸 하자는 아이도 있다. 무기력한 아이들은 여러 가지 심리 기제(포기, 회피, 무능, 거부)를 동원해서 무기력한 상태로만 지내려고 한다.

무기력의 개념은 그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우선 ‘helplessness’로 번역하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시도하다가 포기한 느낌을 포함한 상태를 말하므로 ‘무조감’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무조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더는 도울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의욕이 아예 없는 상태는 ‘avolition’이라고 한다. ‘volition’의 어원은 소망을 나타내는 ‘기원’에 있는데 여기에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 ‘a’가 붙어서 의욕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의지라는 영역에서 보면 아주 수동적인 상태부터 뭔가 하는 것을 거부하는 상태까지를 무기력의 개념에 포함한다. 또 자기의 어떤 행동을 선택한다는 영역에서는 우리가 학습 이론에서 말하는 대로 ‘그냥 이렇게 지낸다’는 조건화한 반응을 비롯한 ‘나는 의지를 갖고 이런 상태로 지내기로 했다’라는 더 적극적인 지점까지를 포함한다.

오랜 시간 무기력하게 지내다 보니 그것이 습관화돼서 기력이 없는 아이들도 있고 기력은 있는데 그냥 하지 않기로 결정해서 겉으로 보기에 무기력해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또 동기(motivation)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려는 동기 자체가 아예 없거나 하려는 동기는 있는 것 같은데 할 만한 능력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다. 매뉴얼화한 경험과 조건화한 반응은 거의 동일해서 항상 선생님이 들어오면 엎드려 자고 나가면 깨고 하는 것이 마치 숙련된 노동자가 매뉴얼에 따라서 움직이듯이 한다는 것부터가 사실은 뭘 한다는 것 자체를 몹시 두려워하는 데서 나오는 행위다.

무기력하게 지내는 상태를 지칭하는 다른 말로 ‘hopeless’가 있는데 ‘무망감’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희망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아론벡(Aron Beck)은 사람의 자살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심리 상태로 무망감을 들었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무기력해지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 늘기 마련이다.

무기력을 다루는 학자들은 이렇게 무기력한 것은 게으른 것과는 많이 다르다고 분석한다. 마음이 얼어붙어서 무기력한 것부터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려는 것까지 현상으로서는 다 똑같이 무기력해 보이지만 그 뿌리는 조금씩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지금 당장 무기력하게 지내기로 결정해서 단순히 게으른 것이 아니라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아니면 어른이라고 해도 대부분 어떤 시기에 일어난 일의 결과로서 무기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기력을 학문적인 개념으로 널리 확산시킨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학습된 무기력’이란 용어를 썼는데 원래 개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도출한 개념이다. 이 실험의 앞부분에서 개는 나쁜 자극에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떻게든 헤어나려고 아등바등한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게 되고 이 상태도 지나면 죽음에 이를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셀리그먼은 ‘하다하다 안 되면 결국 안 된다는 것을 학습해서 무기력하게 있게 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30대 때 이 개념을 만들어서 일약 유명한 심리학자가 되었는데 현재는 우울증을 설명하는 모델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그의 아버지가 뇌졸중에 걸려서 몸의 한쪽을 못 쓰게 되었는데 재활 치료를 아주 열심히 해서 결국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이 과정을 통해서 마틴 셀리그먼은 나중에 ‘학습된 낙관주의’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것은 ‘안 되는 것 같아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을 학습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서 셀리그먼은 이로써 긍정심리학의 대가가 되기도 했다).

사람은 이른 나이에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경험을 반복하면 나중에 자신에게 나쁜 결과가 오거나 손해가 생긴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학습된 무기력의 핵심이 오늘 갑자기 하기 싫어져서 무기력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드시 그 전에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했던 시절이 있고 그런 시절을 겪었기에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것을 학습한 결과 무기력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부모나 교사들이 만나고 있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가운데 만약 무기력한 채 지내기로 결정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나를 만나서 그때 그 순간부터 무기력해진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반드시 해보려고 노력했던 세월이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주어야 한다. 즉, 무기력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사연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 꼭 알고 나서 아이를 대해야 한다.

아이가 무기력해진 원인이 지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지난 세월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돕는 사람의 태도에 상당한 차이를 만든다. 아이가 오늘 무기력해졌다고 생각하고 도우려는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반응은 혹시 나 때문에 무기력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서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오늘 학교에 와서 자는 것은 오랜 세월 이런저런 풍파를 겪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화가 덜 난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흘러왔기에 오늘 이렇게 학교에서 푹 자고 가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바라볼 수 있으니까 당장에 화는 덜 나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무기력은 어떤 지속된 반응의 결과이며 무기력한 상태는 단지 능력이 없다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능력이나 노력의 부재와는 다른 문제다. 지금 무기력한 아이가 능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를 돕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또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앞으로 노력하면 되겠네’라는 생각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학습된 무기력

‘학습된 무기력’ 이론은 1975년 셀리그먼이 처음 발표했다. ‘유기체가 자신의 환경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그 결과로서 통제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을 학습한다’는 내용으로, 그는 이 이론을 통해 무기력도 학습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혐오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의 반응으로 미래의 결과를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즉 자신의 반응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데서 무기력이 발생한다고 했다. 이것은 원래 실험실에서 통제 불가능한 전기 충격에 노출된 개가 나타내는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었다. 우리에 갇힌 개가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학습하면 반응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나중에는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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