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가족과 학교가 무기력을 만든다.

<무기력의 비밀>

by 더굿북

양육과 가족 시스템이 낳은 무기력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만큼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나는 나에게 대체로 만족한다.’

지금 언급한 다섯 가지 질문에 여러분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이 문장은 자존감을 검사하는 항목 가운데 일부로 긍정적인 답변이 많을수록 자존감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존감이 지나치게 높으면 타인을 무시하는 성향을 보일 수도 있지만 너무 낮으면 심한 열등감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무기력한 아이들은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것은 아이들이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얻은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포기하는 욕구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때 아이들의 내면은 어떤 상태일까? 가족이나 학교 시스템을 살펴봄으로써 아이들을 무기력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알 수 있으며 그러려면 아이들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를 이해해야만 한다. 무기력한 아이들이 해소하지 못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과정을 통해 아마 그들의 내면과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과잉보호, 즉 부모가 사랑을 듬뿍 주고 아이가 그 사랑을 흠뻑 받으면 아주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될 것 같지만 사실 과잉보호란 아이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부모가 주도함으로써 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게 하는 것이 과잉보호요, 이는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의 독을 주는 것과 같은 행위다.

과잉보호는 오늘날 가족 구조가 외동인 사회로 가는 데서 비롯한 현상이다. 많은 가정에서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않으면서 부모는 자신들의 열망을 그 아이 하나에 다 걸게 되었다. 결혼할 무렵에는 아이를 셋쯤 낳아서 하나는 예술가를 만들고 하나는 의사를 만들고 하나는 변호사를 만들겠노라 거대한 계획을 세우지만 살다 보면 지금 세상에 아이를 셋씩 낳았다가는 제대로 교육하며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자.’ 그리고 거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아이 하나를 쪼개서 예술가도 만들고 의사도 만들고 변호사도 만들고… 하는 식으로 환상을 품게 되는 것이다.

가령 아이가 친척을 만나는 자리라도 생기면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이모)들은 각각 이거 돼라, 저거 되라며 한 마디씩 거든다. 할머니가 아이에게 원하는 것은 의사니까 의사 손자가 되었다가 삼촌은 변호사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장래 변호사감 조카로 변신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업가가 되라 하고, 이모는 또 연예인이 되면 좋겠다고 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현실 속에서 아이는 결국 부모(가족)의 기대를 실현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아이가 선택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아이들이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두 가지다. 기대를 파괴적으로 깨고 비행으로 가는 것이 하나, 또 하나는 조금 수동적으로, 즉 ‘나는 잘 못 한다’는 것을 천천히 알리는 일이다.

결국, 아이들이 무기력이라는 결과를 보이는 원인은 어떤 경우에는 애정결핍이고 어떤 경우에는 과잉보호지만 둘 다 정당한 사회적 보상이 없어서 생기는 현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부모가 아이를 아예 돌보지 않는 애정결핍이나 방임형 무기력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 보니 무책임하고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성장해서 어느 시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학교 시스템이 낳은 무기력

학교 시스템이 낳은 무기력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학교에서는 매일 획일적인 기준으로 아이들을 혼내고 평가하고 줄 세우고 편애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너무 흔한 이야기라서 과거에는 그러려니 했다면 지금 아이들은 그러려니 안 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아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수동적인 반항, 그냥 하지 않고 지내는 것으로 자신의 의도를 표출하게 된 것이다.

전교생 가운데 한 학년이 100명이라면 그 가운데 무기력하지 않고 재미있게 지내는 아이가 10명 정도라고 한다. 선생님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들이 10퍼센트밖에 안 되는 것이다. 또 다른 10명 정도는 선생님의 관심을 받기는 하는데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이다. 그래도 매일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20퍼센트의 아이들은 괜찮은 편에 속한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80퍼센트 아이들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인데 집에 가면 누구보다 소중한 아들이고 딸인데 학교와 선생님은 나한테 관심이 없다.’ 나와 상담을 했던 한 아이는 새 학년이 되고 나서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딱 두 번, 이틀밖에 부른 적이 없다고 했다. 두 달 동안 학교에 간 날이 40일이라면 아이는 38일 동안 익명의 존재로 생활한 셈이다.

우리 세대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한 학급에 70명쯤 되었으니까 선생님이 내 이름을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자기를 알아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사활을 걸 정도로 민감하다. 집에서는 특별한 존재인 ‘내’가 학교에만 가면 ‘일반화’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전국에 나 같은 아이가 널리고 널렸다는 것, 학교에 가봤자 눈길 한번 받기조차 힘들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도 나오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누군가 내 존재를 알아주기 전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이름을 불러주고 알아주어야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끊임없이 관심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매일 피는 꽃이고 어떤 아이들은 1년에 한두 번밖에 피지 못하는 꽃이 된다. 가정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는 존재로서 누린 경험과 학교라는 큰 울타리에서 어떤 형태로도 관심을 끌기 힘든 경험 사이에 괴리가 생기면 학교와 교사가 내게 무관심한 것처럼 나도 받은 것이 없는 학교와 선생님에게 무관심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왜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성질을 부리거나 짜증을 낸다. 아이들은 학교를 ‘내가 관심을 받으며 활동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라고 느끼지 않음으로써 점점 무기력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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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옛날처럼 교사들이 교실에 들어가도 출석을 잘 안 부른다. 한 아이가 내게 명찰과 관련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자기는 학교에서 왜 명찰을 달라고 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 아이 말에 따르면 자기는 외국 청소년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인데 그쪽 아이들은 명찰이 없단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명찰의 용도는 뭔가를 잘못했을 때 (이름을 모르니까)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혹은 떼어내서 기분 나쁘게 하려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는 명찰이 학생을 위해서 있는 건지 선생님을 위해서 있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명찰을 없애야 하고 선생님들이 아이들 이름을 다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에는 이름 한 번 안 불러주면서 혼낼 일이 있거나 학교 규칙을 위반했을 때만 필요한 것이 명찰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가 나를 알아주어야 기력과 의욕이 생긴다. 하물며 청소년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를 몰라주는데 혹여 알아주더라도 잘못하는 것으로만 알아보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너는 특별히 못 하는 것도 없지만,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어’라는 말이나 생각을 노출하는 것도 엄청난 상처를 입힌다는 사실을 어른들이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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