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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3. 2016

08. 섬세한 붓에 단아한 마음이 녹아들다.

<사임당 평전>

고종 5년(1868년)에 윤종의(尹宗儀, 1805~1886)가 강릉 부사로 부임하여 최씨 집안의 병풍을 보고 또한 감격하였다. 이 글씨를 본 윤종의는 병풍으로 보존하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판각할 결심을 했다. 

     
그런데 이 무렵 최씨 집안에 불이 일어나 이때 최씨 집안의 할머니가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 사임당의 글씨 병풍을 먼저 꺼내고 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어 율곡의 친필 글씨가 든 궤짝을 끌어내다가 불 속에 쓰러진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무리 집안의 가보라 한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을 어느 누가 쉽게 뛰어들어 구할 수 있을까. 이러한 희생 뒤에 건져 낸 사임당의 친필 유적은 그런 고난의 역사까지 거쳤기 때문에 더욱더 빛나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지 두 달 후에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구히 보존하고자 나무판에다 본래의 글씨를 그대로 본떠 새겨서 판각을 만들었고 새로 만든 이 판각을 대대로 오죽헌을 지켜온 권씨 집안에 주어 몽룡실에 간직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사임당의 초서 여섯 폭짜리 병풍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게 된 데에는 여러 사람의 노고가 있었다. 윤종의의 발문을 살펴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 과연 그 필적에 이르러서는 정성 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더욱더 부인께서 저 옛날 문왕의 어머니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우러러볼 수 있다. 어허! 삼연 선생의 시에 ‘그 어머니였기에 그 아들을 낳았다’고 한 것은 실로 공경하고 감탄해서 한 말이며 사람으로 어느 누가 어머니가 없으리오마는 율곡 선생처럼 이름을 날려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는 그런 효성을 바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는 것이다. 진실로 선생의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삼아 유연히 효심이 우러나서 내 어버이 그리워하는 사랑을 가지고 스승을 사모하는 데 미치는 자라면 과연 이것을 경외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글씨를 올려 새겨 놓은 이 판본은 길이 보배가 될 것이다.”

「송시」, 신사임당 | 27.8×15.4cm, 강릉시오죽헌· 시립박물관 소장


   
이형규의 발문에서도 언급되었고, 또 윤종의의 발문에서도 언급된 삼연 김창흡의 시는 삼연이 오죽헌에 와서 지은 시다. 6구는 율곡의 다섯 살 적 이야기로, 사임당이 병환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어린 율곡이 집 뒤에 있는 외조부 사당 앞에 가 엎드려서 ‘어머님 병환을 속히 낫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했던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
     
儒賢所出大瀛濱 l 어진 학자 나신 고을 동해 바닷가
故老相傳孟氏隣 l 전하는 말 예가 바로 길러 내신 곳
是母眞能生是子 l 그 어머니였기에 그 아들 낳아
斯文何幸有斯人 l 그분 계심이 얼마나 다행인고
咿唔竹裡硏經夕 l 저 대숲엔 저녁마다 글 읽던 소리
匍匐祠前禱疾晨 l 사당 앞은 모친 병환 기도하던 곳
几サ閣猶留要訣草 l 책상 위엔 ‘요결’ 초고 상기도 남아
試看心畵摠精神 l 획마다 맑은 정신 배어들었네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획마다 사임당의 맑은 정신이 배어 있어 그 뜻이 아들 율곡은 물론 7남매 모두에게 전해졌으리라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윤종섭(尹鍾燮, 1791~1870) 또한 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예찬했다.
     
先生胎敎本乎心 l 선생의 받은 태교 어머니 마음 하나
堂號巋然學摯任 l 당호조차 훌륭하여 지임을 배우나니
嶽降溟州留大道 l 산정기 명주에다 크신 도를 머물렀고
天垂蘂國嗣徽音 l 하늘이 예국에다 좋은 전통 있게 했네
草書入妙藤花古 l 신묘한 초서 글씨 등꽃처럼 예스럽고
體變如雲筆彩深 l 구름같이 체를 변해 붓 솜씨 찬란하니
太守神明登顯刻 l 저 태수 현명하여 판각에 올려 새겨
寄來經幌不勝欽 l 내게 한 벌 보냈기로 삼가 받아 공경하네
# '지임'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이다.
     
“구름같이 체를 변해 붓 솜씨 찬란하니”와 같이 정식 교육도 받지 않은 규방 규수의 글씨가 과연 어느 정도였기에 이 같은 예찬 시가 전해질까. 사임당의 초서 글씨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을 만한 일이다.
     
현재 이 「초서병풍」은 오랜 세월, 우여곡절을 거친 탓에 벌레 먹은 곳도 있고 더럽혀진 자국도 있고 그래서 흐릿해지고 타락된 점 획을 보충한 자취도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서여기인’이라 했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 그렇기에 붓은 사람과도 같다. 왜냐하면, 붓에도 마음(心)이 있기 때문이다. 심(心)은 인(仁)과 다르지 않고 인(仁) 또한 인(人)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용필의 오묘함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학자 유희재(劉熙載, 1813~1881)는 이렇게 말했다.
     
“서예는 닮는 것이다. 그 사람의 학문을 닮고, 그 사람의 재주를 닮고, 그 사람의 뜻을 닮는다. 종합하여 말하면 그 사람을 닮을 뿐이다.”
  

「여(與)」, 신사임당 | 15.7×11.6cm |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유희재의 말은 서예 작품 속에 글씨를 쓰는 사람의 모든 것이 담기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서예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그 외형적 조형만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 담겨 있거나 때론 감추어져 있는 품격과 격조를 음미하고 이해해서 마음으로 감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임당의 글씨 또한 사임당을 그대로 닮았음이 분명하다. 오랜 세월에 그 빛은 퇴색되었지만, 사임당의 높은 학식과 올곧은 도덕적 인격과 정신은 세월을 더해 지금 우리에게 또 다른 가르침을 주고 있다.
     
사임당의 필적 중에서 가장 많은 자료가 전하는 것이 초서이다. 사임당 이전에는 중국 당나라의 장욱과 회소의 영향을 받아 획의 굵기와 길이에 차이를 크게 주고 비스듬한 사선을 길고 강렬하게 표현하며 좌우로 붓을 흔들어 강한 동세를 구사하는 등의 역동적인 초서 풍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와 달리 깔끔한 필 획과 짜임으로 단아한 서풍을 보이는 초서 풍도 등장하는데, 그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을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초서병풍」의 서체가 그 이전의 어느 명필의 글씨에서도 보기 어려운 독특한 서체의 풍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뒤 이러한 서풍을 따르거나 유사하게 구사하는 명필이 등장하게 되는데, 후대의 학자들이 이를 ‘사임당서파(師任堂書派)’라고도 명명한 것을 보면 사임당의 붓 솜씨는 과연 그 일파를 이루고도 남을 위상을 점하고 있다.
     
현재 ‘사임당서파’라고 명명된 이들은 당시의 초서 명필로서 신사임당의 서풍을 뚜렷하게 따랐거나 부분적으로 수용한 사람들로 사임당의 넷째 아들인 옥산 이우와 신사임당과 사돈지간이었던 고산 황기로,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과 송호 백진남(松湖 白振南, 1564~1618) 부자(父子), 그리고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 등이 있다. 신사임당을 비롯해 16세기 중후반과 17세기 초에 활동했던 ‘사임당서파’라고 불리는 초서 명필들의 글씨는 간단하고 깨끗한 점 획, 단정한 짜임, 원필과 직필의 조화 등이 그 특징이다. 이처럼 신사임당은 16세기 초기에 초서 풍의 한 계통인 사임당 서풍을 연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의 초서체를 이끈 이가 바로 조선 시대의 규방 규수였던 사임당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사임당의 진심(盡心)이 글씨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다. ‘등꽃처럼 예스럽고 글자체의 변화가 구름 같아 글씨의 빛깔이 깊다.’는 윤종섭의 극찬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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