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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6. 2016

09. 사임당, 생명의 힘을 그리다.

<사임당 평전>

사임당의 포도 그림에는 사임당의 인품을 확인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오는데, 사임당이 강릉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이웃집에 잔치가 있어 사임당도 초대를 받아 갔다. 그런데 심부름을 하던 계집종이 음식 그릇을 어느 부인의 비단 치맛자락에 쏟았다. 사실 이 부인의 옷은 이웃집에서 빌려 입고 온 것이라 크게 걱정을 하였는데, 이때 사임당은 그 집 주인에게 벼루와 붓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하고는 얼룩진 비단 치마를 펼쳐 놓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 그림은 싱싱한 잎 속에서 탐스럽게 익어 가는 포도송이를 그린 정교한 그림이었다. 사임당은 이 치마를 부인에게 돌려주면서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 그 돈으로 새 비단 치마를 사도록 했다.
     
사임당에게서 포도송이 그림 치마를 받은 부인이 곧장 시장으로 치마를 팔러 나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 포도송이 그림 치마를 유심히 살폈다. 그중 한 부인이 “이 그림은 누가 그린 것입니까?” 하고 묻자 사임당이 그린 것이라는 말에 그 부인은 얼굴에 기쁜 빛을 나타내며 많은 돈을 내고 사 갔다. 그래서 이웃집에서 옷을 빌려 입고 왔던 부인은 그 돈으로 비단 치맛감을 사서 치마 임자에게 새 감으로 돌려주고도 몇 감이 더 남았다고 하는 일화가 전한다. 이 일화를 보면 사임당은 이미 그 지역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이로 정평이 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여섯 가지 회화육법(繪畵六法)이 필요하다. 이는 중국 남조 제(齊)나라의 화론가이며 작가인 사혁(謝赫)이 진(晉)나라의 화가 27명을 품평한 『고화품록(古畵品錄)』의 서문에서 회화를 비평하는 여섯 가지 기준을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중국 화평이 기준이 된 것이다.
     
여섯 가지 기준 중 가장 낮은 단계는 ‘전모이사(傳模移寫)’로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즉 옛 화가들의 그림이나 선생의 그림을 그대로 베끼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단계의 요령은 ‘경영위치(經營位置)’로서 그림에서 화면의 구상과 배치를 말한다. 다음 네 번째 단계의 수준은 ‘수류부채(隨類賦彩)’의 요령인데, 이는 종류별로 같은 부류의 색채와 수식을 입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응물상형(應物象形)’의 단계는 그 물(物)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그 순간적으로 포착된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즉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 있는 힘을 부각하는 일이다. 다음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골법용필(骨法用筆)’로 붓놀림에 힘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 마지막 단계로 사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기운생동(氣韻生動)’은 작품 속에 깃든 작가의 예술 정신 혹은 예술혼이다. 이는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작가의 정신적인 측면, 생명력, 멋스러움 등의 표현이 작품을 만드는 데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조선 전기의 회화는 고려 시대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또 중국의 화풍을 수용하여 다양한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 중심에 사대부들의 영향이 매우 컸으며 그들은 성리학적 사상 아래 수양의 한 방법으로 회화를 선택하여 발전시켰다. 이러한 회화의 활발한 움직임은 조선 건국 후 정치, 사회, 경제가 안정되면서 세종, 성종 등의 후원 아래 조선 전기 회화를 주도하였다.
     
사대부(士大夫)들의 미술로는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그 당시의 회화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시화일치(詩畵一致), 서화일치(書畵一致) 사상에서 발효된 문인수묵화를 기본으로 삼아 발전하였다. 시와 그림 모두 우주 만물의 이치와 천지조화의 자연법칙과 같이 작가 자신의 내면의 진리로 창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주객이 합일된 상태로 작가의 마음과 사물의 참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사대부들의 예술 사상이 결부되어 문인수묵화가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룩한 시기였다.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대부들이 그린 작품들은 산수화(山水畵), 사군자(四君子)가 우선적이었다.
     
사임당의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시・서・화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 전하면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인 분야가 바로 그림이다. 율곡의 「선비행장」을 통해 우리는 사임당이 15세기 우리나라 제일의 도화서 화원이었던 안견의 그림 양식을 따른 산수화를 그렸으며, 한・중・일 삼국에서 문인화의 주요 화목 가운데 하나인 묵포도(墨葡萄)를 그렸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묵포도」, 신사임당 | 31.5×21.7cm, 간송미술관 소장


 
산수화와 묵포도도 이외에도 그녀가 그렸다고 전해 오는 그림들은 풀벌레, 화조, 어죽, 묵죽, 묵매 등 그 소재가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전칭된 화목은 우리나라의 다른 여류 화가들과 비교하면 아주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 전하는 것은 채색 초충도이다. 지금 전하는 조선 시대의 초충도는 거의 사임당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초충도 화목에서의 사임당의 위상은 매우 높다.
     
이런 소재들을 그린 사임당의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로서 후세의 시인과 학자들은 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붙여 침이 마르도록 절찬하였다. 절찬의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만큼 후세의 절찬이 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아름다운 모습을 재현하고자 그린 그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며 그 안에 생명력을 담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기에 감동 또한 함께 살아 숨 쉬어 세월과 함께할 수 있었다. 
     
이는 사혁이 회화육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기운생동의 힘, 그림에 생기와 품격,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임당의 정신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임당의 정신적인 힘, 즉 예술 정신이 어떻게 그림에 드러났는지 현존하는 기록과 꼬리말을 통해 알아보자. 
     
사임당의 회화에 관한 문헌 기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아들 율곡 이이가 「선비 행장」을 통해 남겨 놓은 글과 사임당과 동시대를 살았던 어숙권이나 소세양 등이 남긴 짧은 기록들이고, 둘째는 현재 사임당의 것으로 전칭된 그림들에 쓰인 발문들이다. 이들 발문은 대부분 17세기 이후 율곡 성리학의 추종자들이 쓴 것이다. 그 수나 분량으로 보면 두 번째 부류의 기록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쓰인 발문들은 사임당 그림 자체의 예술적인 모습에 대한 발문이라기보다는 율곡의 어머니라는 선입관에 크게 지배받아 그녀의 예술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흐리게 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사임당이 율곡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예의로 과찬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예술성이 너무나 뛰어났음을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곱 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화를 그렸을 정도로 사임당의 그림 솜씨는 비범하였다. 물론 이것은 사임당이 남달리 익히는 재주가 뛰어난 탓도 있겠지만, 사임당의 천재성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사임당의 천재성에 감탄한 발문들을 먼저 살펴보자. 먼저 사임당이 가장 많이 그렸던 초충도에 전해지는 발문 중 가장 이른 시기로 알려진 우암 송시열이 「가을 풀과 나비 떼(秋草群蝶圖)」에 쓴 발문을 살펴보자.
     
“이것은 고(故) 증찬성 이공의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이 그림에 표현된 것은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자연스럽고 인력이 범할 수 없다. 이와 같을진대 오행(五行)의 정수(精髓)를 얻고 원기(元氣)의 융화(融和)를 모아 이로써 참다운 조화(造化)를 이룸에야! 마땅히 그가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이 발문은 오행의 정수를 얻고 원기의 융화를 모아 참다운 조화를 이룬 신묘한 작품으로 그림의 위상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송시열의 이 발문은 신사임당이 율곡의 어머니임을 내세움으로써 이후 쓰인 발문에 화가로서의 사임당의 모습보다는 율곡의 어머니로서의 사임당의 모습이 주로 등장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이 그림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발문만이 송시열의 문집을 통해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발문을 살펴보자. 영조 때 문신 조귀명(趙龜命, 1693~1737)이 쓴 「의진이 간직한 신부인의 그림첩에 적는다」는 제목의 발문은 의진이란 이가 간직했던 화초 8폭에 써 붙인 것인데, 이 발문 또한 주인을 잃은 상태다. 그림은 없어지고 발문만 전해 아쉬움이 크다. 
     
조귀명은 발문에서 “붓 솜씨가 그윽하고 고우면서 고상하고 명랑하니 그 그윽하고 고운 것은 여성인 까닭이요. … 채색 칠하는 것도 더욱 형언하기 어려우니 이 어찌 그림 법에나 맞추려고 애쓴 것이랴. 역시 그 천재가 높았기 때문이리라.”라며 사임당의 천재성을 칭송하고 있다. 
     
다음으로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지은 「사임당 신씨의 그림 폭에 적는다」를 살펴보자. 
     
“그림으로써 세상에 드러난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마는 모두 남자요 부인은 전혀 없으며, 또 잘 그리는 이는 많아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이는 드문데 부인으로서 그림을 잘 그려 신묘한 데 들어간 이야말로 오직 우리나라 사임당 신씨가 그분이다. 그러므로 사임당의 그림이 세상에서 진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 저 값진 구슬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이다.”
   
이 글은 홍양호가 지니고 있던 4폭 그림첩에 스스로 지어 붙였던 발문인데 그림은 어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이 발문 뒷부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제1폭은 「대와 학」, 제2폭은 「버들과 꾀꼬리」, 제3폭은 「산수」, 제4폭은 「꽃과 나비」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홍양호의 발문 이후에는 그 그림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자세하지 않고, 또 이 발문에 따른 그림이라 전하는 것도 아직 사임당의 전칭작이라 확정되지는 않아 확인할 수 없다. 더 많은 연구가 이어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그림이 제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 그림」, 傳 신사임당 | 18.7×14.5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17세기 이후 율곡 성리학의 추종자들이 쓴 발문은 사임당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율곡의 어머니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 당시의 정치 환경의 영향으로 신사임당이 주체적인 모습보다는 객체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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