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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6. 2016

10. 사임당, 수틀 속의 조물주였다. (마지막 회)

<사임당 평전>

모든 옛 기록을 통하여 볼 때 사임당은 시・서・화뿐만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자수는 조선 시대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 중 하나였기 때문에 사임당의 손에서 수없이 많은 자수 작품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사임당의 자수품이 많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사임당의 전칭 자수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8폭의 자수 병풍인 「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이 유일하다. 이 병풍은 수본(繡本), 수사(繡絲), 침법(針法) 등 한국의 전통적인 자수 기법으로 만들어져 아름답고 섬세하며 정성을 다한 사실적인 초충도수병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자수 병풍은 해방 뒤에 충청남도 지방에서 찾아낸 것이라 한다. 그 유래에 대하여 옥산의 후손인 이장희 댁에서 전하는 말을 참고하면, “옥산의 후손 중 덕해공의 자손 태영공이 충청도 진잠에서 살다가 목천으로 옮겨 갔는데 그 집에 자수 병풍이 있었다.”라고 전해진다.
     
각 폭이 사임당의 여러 초충도 작품보다 큰 길이 65cm, 너비 40cm의 크기로 되어 있고, 검은색 공단에 수를 놓았다. 50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현재는 그 빛깔이 많이 퇴색되었으나 여전히 은은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병풍의 자수 기법은 고려 시대부터 전해진 꼰 실을 사용하여 수를 놓는 자련수(刺連繡)로서 올이 굵어 약간 거칠어 보이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자수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이와 개구리, 맨드라미와 도라지꽃, 원추리와 들국화, 꽈리, 석죽과 민들레, 수박, 가지와 벌, 들국화를 소재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이 「초충도수병」 여덟 폭의 소재나 구도는 앞서 살펴본 국립중앙박물관의 「초충도 8폭」과 강릉시 오죽헌 시립박물관의 「풀벌레 8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임당 평전 385 「오이와 개구리」, 신사임당 | 65×40cm,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자수 병풍의 1폭 「오이와 개구리」는 같은 소재의 국립중앙박물관 병풍의 제3폭 「오이와 개구리」와 비교될 만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오이와 개구리」는 여덟 폭 가운데 식물 묘사가 가장 자연스러운데, 오이 넝쿨이 두 포기의 조(粟)를 휘감은 모습을 간결하게 포착하였다. 이에 비하여 자수 폭에서는 오이 넝쿨이 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오이꽃이 열매의 끝에 아직 달려 있고 줄기에도 군데군데 피어 있다. 그리고 들국화가 자수 폭의 윗부분을 자연스럽게 채우고 있다. 오이를 바라보는 개구리의 모습과 들국화를 향해 날아오는 잠자리의 모습에서 자수임에도 불구하고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 평가되고 있다.

「가지와 벌」, 신사임당 | 65×40cm,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이 자수 병풍 가운데 7폭 「가지와 벌」은 소재와 구도 면에서 국립중앙박물관 병풍의 2폭 「가지와 방아깨비」와 매우 흡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지와 방아깨비」는 다소 경직되어 있다고 평가되는데, 자수 병풍은 가지 줄기에 꽃이 달려 있다든지 가느다란 바랭이 풀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공간을 채우고 있는 등 채색화에서의 경직성과 달리 전체적으로 한층 자연스럽고 천진스러운 인상을 준다고 평가된다. 또한, 이 「가지와 벌」 자수는 오만 원권 지폐의 도안에도 나타나 있는데, 오만 원권 앞면의 사임당 얼굴 옆 포도 그림 바탕에 연한 음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교적 거친 자수이기 때문에 채색화에서처럼 잎의 앞과 뒷면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지는 않지만 단순한 가운데 오히려 그 자연미가 더 드러나 있다.
   

  
자수 작품이기에 채색화보다 더 정교하게 표현할 수 없고, 더 화려하게 채색할 수 없지만, 가느다란 덩굴손이나 기타 작은 풀도 비교적 섬세하고 정교하게 그 색을 찾아 옷을 입혔다. 이런 점에서 이 「초충도수병」은 사임당의 자수와 그림에 대한 명성을 동시에 뒷받침해 준다. 또한, 사임당 전칭의 여러 채색초충도와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색실과 섬세하고 숙련된 솜씨가 일품인 이 자수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의 하나로 복식 공예의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자수 병풍에는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의 발문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율곡 선생 어머니 사임당 신부인은 여자 중의 군자이시다. 나는 평생에 부인을 숭모할 뿐만 아니라, 마치 자손이 조상을 대함 같이 하는 것이다. 이제 이 자수 병풍을 보니, 그 수놓는 법이 어떠하다는 것은 감히 논평하지 못하나 그 그림법에 있어서만은 고상하고 청아한 품이 보통 도안 따위와는 견주어 말할 수 없다.”
   
조물주가 빚어낸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색을 인간이 어찌 흉내 낼 수 있겠냐만은 그림 안에서도, 수틀 안에서도 그 아름다움은 오롯이 사임당의 몫이었다. 텅 빈 곳에 가지며 오이며 수박의 살이 오르고 맨드라미, 원추리, 들국화가 꽃을 피울 때 사임당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행복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렇게 수틀 안에서는 사임당이 작은 조물주가 되었다.
     
  

     
<사임당 연보>
     
□ 1504년(갑자, 연산 10년) 1세
10월 29일(음력)에 강원도 북평촌의 어머니 이씨의 친정에서 태어나다. 아버지 평산 신씨 명화 공(당시 29세), 어머니 용인 이씨(당시 26세) 사이에서 난 아들 없는 다섯 딸 중의 둘째 딸이다.
     
□ 1510년(경오, 중종 5년) 7세
아버지 신명화 공의 집은 한성(漢城)이나 어머니 이씨의 친정은 강릉 북평촌으로 어머니가 외조부 생원(生員) 이사온(李思溫)과 외조모 최씨 사이에서 난 무남독녀라 어머니는 항상 친정 부모를 모시고 강릉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임당도 어려서 늘 어머니의 친정인 북평촌에서 살며 외조부의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薰陶) 아래서 자랐다.
안견의 화풍을 본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여러 가지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하다.
   
□ 1513년(계유, 중종 8년) 10세
어려서부터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다.
     
□ 1516년(병자, 중종 11년) 13세
부친 신명화 공(당시 41세)이 한성에서 진사(進士) 시험에 오르다.
     
□ 1519년(기묘, 중종 14년) 16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학자가 화를 당했을 때 부친 신명화공은 그들의 동지였으나 다행히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 1521년(신사, 중종 16년) 18세
강릉 북평에서 외조모 최씨가 별세하다.
부친 신명화 공(당시 46세)이 한성으로부터 강릉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절망적이었는데 어머니 이씨가 조상의 무덤 앞에 가서 손가락을 끊어 지성껏 기도했더니 이튿날 아침 사임당의 꿈에 신(神)이 하늘로부터 대추 알만한 약을 가지고 내려와서 신명화 공에게 먹이는 일이 있자 부친의 병환이 나았다. (뒤에 이 사실을 들어 율곡이 『이씨 감천기』에 쓰다.)
     
□ 1522년(임오, 중중 17년) 19세
덕수(德水) 이씨 원수(元秀) 공(당시 22세)에게 출가하다.
출가하고도 그대로 친정에 머물러 있던 중 11월 7일에 친정아버지(당시 47세)가 서울 본가에서 마침내 별세하다.
     
□ 1524년(갑신, 중종 19년) 21세
한성에서 시어머니 홍(洪)씨 부인에게 신혼례를 드리다.
9월에 한성에서 첫째 아들 선(璿)을 낳다.
다시 이로부터 십여 년간 파주, 강릉, 봉평으로 옮겨 다니다.
     
□ 1528년(무자, 중종 23년) 25세
강릉 친정어머니 이씨의 열녀정각(㫌閣)이 서다.
     
□ 1529년(기축, 중종 24년) 26세
맏딸 매창(梅窓, 뒷날 조대남에게 출가함)을 낳다.
     
□ 연대 미상, 1531년으로 추정(신묘, 중종 26년) 28세
둘째 아들 번(璠)을 낳다.
     
□ 연대 미상, 1533년으로 추정(계사, 중종 28년) 30세
둘째 딸(뒷날 윤섭에게 출가함)을 낳다.
     
□ 1536년(병신, 중종 31년) 33세
셋째 아들 이(珥) 출산. 이른 봄 어느 날 밤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닷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 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다. 다시 그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 선생이다.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고 한다. (전설로는 봉평에서 배어 강릉 친정에서 낳았다고 한다).
     
□ 연대 미상, 1538년으로 추정(무술, 중종 33년) 35세
셋째 딸(뒷날 홍천우에게 출가함)을 낳다.
     
□ 1540년(경자, 중종 35년) 37세
병석에 누워 몹시 고통받다. (병환으로 온 집안이 걱정에 잠겼는데 다섯 살 난 율곡이 어디로 가고 보이지 않아 모두 나와서 찾아보니 어린 율곡이 사당 앞에 가서 엎드려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므로 달래어 안고 돌아온 일이 있다).
     
□ 1541년(신축, 중종 36년) 38세
강릉 친정에서 어머니 곁을 떠나 한성으로 올라가며 대관령에서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을 읊다. 
서울 수진방(壽進坊)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하다.
     
□ 1542년(임인, 중종 37년) 39세
넷째 아들 우(瑀)를 낳다.
     
□ 연대 미상, 1544년으로 추정(갑진, 중종 39년) 41세
서울에서 살며 늘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려 시를 읊으며 눈물을 짓다.
     
□ 1545년(을사, 인종 원년) 42세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부인은 돌아가신 친정 부친 생각과 함께 남아 계신 어머니를 더욱 그리워하다.
     
□ 1550년(경술, 명종 5년) 47세
여름에 부군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되다.
     
□ 1551년(신해, 명종 6년) 48세
집을 삼청동(三淸洞)으로 옮기다.
여름에 부군이 세곡을 실어 올리는 일로 평안도 지방으로 아들 선과 이와 함께 가다.
5월 17일(음력) 새벽, 병으로 누운 지 이삼일 만에 홀연히 별세하다. 바로 그날 부군과 두 아들이 배를 타고 서강(西江)에 도착하여 부인의 별세 소식을 듣다. (이때 부군은 51세, 맏아들 선은 28세, 맏딸 매창은 23세, 율곡은 16세, 넷째 아들 우는 10세였다. 둘째 아들 번과 둘째 딸, 셋째 딸은 연도 미상으로 정확한 나이를 모름.)
파주 두문리(斗文里) 자운산(紫雲産)에 장사 지내다.
후에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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