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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6. 2016

07. 정약용 :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철학자의 조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근래에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옛날 원고를 살펴보았다. 어려움을 겪기 전에 궁궐에서 펄펄 날 때 지은 시는 처량하고 우울했다. 장기에 귀양 갔을 때 지은 시는 더욱 슬퍼서 비통하기까지 했다. 강진에 온 이후 지은 시는 대부분 마음이 넓어진 상태를 보여주는 말과 뜻을 담고 있었다. 고난을 겪기 전에는 이런 기상을 갖지 못 했다. 이런 기상을 가지게 된 뒤로는 힘은 들어도 걱정은 없었다.”
  

 
정약용은 이 편지를 강진에서 썼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세 시기로 구분했다. “궁궐에서 펄펄 날 때”, “장기에 귀양 갔을 때”, 그리고 “강진에 온 이후”다. 이를 다시 귀양 전후의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시기는 18세기와 19세기로 갈라진다. 그는 18세기에 38년을 살았고, 19세기에 36년을 살았다.
     
18세기에 정약용은 펄펄 날았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 고위 직책을 맡았던 잘 나가는 벼슬아치였다. 그러나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의 처지는 달라졌다. 1801년에 장기로 귀양 가게 되었고, 다시 귀양지가 강진으로 바뀌면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펄펄 날던 때 지은 시가 처량하고 우울했다고 평가했다. 아마도 그 시대의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정약용이 벼슬살이하던 시기는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 일이 쉽지 않은 때였다.
     
장기에 귀양 갔을 때 지은 시는 더욱 슬퍼서 비통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왜 그럴까?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그 죄목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조의 명령으로 이미 관계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귀양 가기 직전 감옥에 갇혔을 때 정약용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소무는 19년 동안 참았는데, 지금 너는 19일도 못 참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소무(蘇武, 701~762)는 중국 한나라 때의 벼슬아치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간 억류되었던 사람이다. 이 일화는 그가 감옥살이를 견디기 어려워했음을 보여준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기에서 쓴 시는 슬프고 비통할 수밖에 없었다.
     
장기에서의 귀양살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귀양지가 강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이 정약용을 귀양 보낸 이유는 사실 천주교 때문이 아니었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약용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강진으로 정약용의 귀양지를 바꾼 것이었다. 장기에서 귀양살이할 때만 해도 정약용은 귀양이 곧 풀려 벼슬자리에 복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귀양지가 바뀌자 그는 그 기대를 접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하며, “소싯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20년간 세상일에 간여하느라 그 뜻을 잊고 살았다. 이제야 여가를 얻었구나”라고 했다. 벼슬에 대한 기대를 접은 것이었다. 따라서 강진에서 지은 시에는 “마음이 넓어진 상태를 보여주는 말과 뜻”을 담을 수 있었다.
     
불행이 곧 행운이었다. 18년간의 귀양살이가 정약용을 더욱 분발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500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대학자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정약용을 벼슬아치가 아니라 학자로서 기억하고 있다.
     
     

농촌이 화약고가 되다.

정약용이 귀양살이한 지 10년 만인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홍경래 등이 주동이 되어 10년간 준비하여 일으킨 난이었다. 이 난에는 상인, 농민, 노동자, 빈민은 물론 양반까지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홍경래 등은 ‘서북 지역 차별 폐지’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을 타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전에 군대를 모집하고 무기를 사들이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다. 또한, 그들은 일종의 도참설인 ‘정진인설(鄭眞人設)’을 퍼뜨려 새로운 나라의 수립이 불가피하다는 선전을 하는 등 사전 작업도 철저히 했다.
     
이렇듯 조선을 타도하기 위한 난이 준비되고 실행되었다는 것은 조선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홍경래의 난은 불과 4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조선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홍경래의 난 이후로 전국에서 크고 작은 농민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조선의 위기는 정조 이후에 갑자기 발생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위기는 이미 정조 시대 이전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조선이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중세의 질서가 흔들리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신분 질서의 동요가 나타난다. 조선에서도 신분 질서가 동요하고 있었다.
     
신분 질서의 동요는 임진왜란 이후 시작되었다. 조선 사람들의 신분은 ‘양반-평민-노비’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에서 우선 노비의 수가 임진왜란 이후 감소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대량의 노비 문서가 불타 없어졌고, 피란 과정에서 수많은 노비가 도망쳤다. 전쟁 이후 조정까지 나서서 도망친 노비를 잡으려 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 이후로도 수많은 노비가 도주, 몸값 지급, 호적 조작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신분의 질곡에서 벗어났다.
     
반면 양반의 수는 증가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대량의 공명첩을 발행했다. 돈을 받고 명예직 벼슬을 판 것이었다. 그래서 평민은 물론 노비 중에도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양반이 되었다. 또한, 전쟁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장사로 돈을 번 상인들이 출현했다.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부농층도 등장했다. 이렇듯 재력을 갖춘 평민들이 늘어난 것도 양반 수가 증가하는 요인이었다. 그들은 벼슬이나 족보를 사거나, 지방의 하위직 벼슬아치와 짜고 호적을 위조하는 등의 방법으로 양반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양반이 되고자 했을까? 정약용은 〈신포의(身布議)〉에 이렇게 썼다.
     
“양반이 되어야 군포를 면제받을 수 있으므로 백성들은 밤낮으로 양반이 되는 길을 모색한다. 고을 호적부에 기록되면 양반이 되고, 거짓 족보를 만들면 양반이 되고,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하면 양반이 되고, 두건을 쓰고 과거 시험장에 드나들면 양반이 된다. 몰래 많아지고, 암암리에 늘어나고, 해마다 증가하고, 달마다 불어나 장차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반이 되고 말 것이다.”
   
군포를 면제받기 위해 양반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즉 양반이 누리는 특권 때문이었다. 양반은 개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 대표적인 세금이 군포였다.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평민 남성은 군포를 1필씩 내야 했다. 한 집안에 성인 남성이 많으면 그 부담이 적지 않았다. 양반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양반이 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정약용이 소개한 방법들 이외에도 양반 자리를 사고파는 일도 있었다. 박지원의 〈양반전(兩班傳)〉이 그런 경우를 보여준다. 그런데 양반 자리를 산 사람도 양반이 되지만 그것을 판 사람 역시 계속 양반이었다. 이래저래 양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정조 때 전체 인구의 30~40%가 양반이었다. 조선 초에 약 7%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4~6배가 늘어난 것이었다.
     
양반 수가 늘면 국가 재정이 부족해진다. 양반은 세금을 면제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농민의 세금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양반 수가 급증하면서 농민의 부담은 과중해졌다. 당연히 농민의 불만은 높아졌다. 어느 순간 농민들이 인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자 농촌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로 변해갔다. 그렇게 조선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누군가 불을 댕기면 금방 폭발할 상황. 홍경래 등이 그 불을 댕겼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나타난 위기는 이전 시대의 위기와 달랐다. 중세적 방법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위기였다. 근대로 이행하면서 나타난 위기로, 중세의 질서가 부정되어야 해소될 위기였다. 정조 시대의 벼슬아치나 학자들은 위기의 실체를 온전히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애민사상에 바탕을 두고 해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양반 수를 줄이자!

벼슬을 하던 시절, 정약용은 정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높기로는 양반이 으뜸이고, 이익으로는 장사가 으뜸이며, 편안하기로는 장인이 제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백성들이 양반이 되고, 상인이 되고, 장인이 되려고 한다는 얘기다. 반면 “농업은 이익이 적어 농민의 신분이 날로 낮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농업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백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의 순서를 밝힌 내용이어서 흥미롭다. 본래 사농공상, 즉 양반, 농민, 장인, 상인 순으로 직업별 순위를 매겨서 장인과 상인은 천한 직업으로 여겼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상인과 장인을 농민보다 선호하게 된 것이었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었다. 이미 조선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고 있었다. 이행기에는 시민이 출현하여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조선에도 그런 시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장사하거나 물건을 만들어 돈을 번 사람들이 바로 그 시민이었다.
     
재력을 갖춘 시민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나는 양반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양반 자리를 샀다. 아니면 지방의 하급 벼슬아치를 매수하여 호적을 조작해 양반이 되었다. 한편 양반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시민들도 있었다. 홍경래의 난에 가담한 상인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조선을 타도하여 스스로 자기 권력을 세우고자 했다.
     
이런 시기에 제시된 정약용과 박지원의 대책을 비교해보자. 두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로, 박지원이 스물다섯 살 위였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는 벼슬아치였고, 박지원은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열하일기》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남인 출신이고 박지원은 노론 출신이었기 때문이리라.
     
정약용은 농업을 중시하여 상업을 억제하자고 했다. 반면 박지원은 상업의 장려를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성장 배경의 차이와 연관된다. 정약용은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나 20대 초반까지 지방을 돌며 살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농업에 익숙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한양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자랐다. 당시 한양의 인구는 10만 명을 헤아렸고, 그중 상당수가 상업에 종사했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상업에 익숙했다.
     
농업 중시와 상업 중시는 당시로는 심각한 차이가 아니었다. 실제로도 정조는 농업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면서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통해 상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했다. 주목할 점은 정약용과 박지원이 양반 사회의 개혁에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그 두 사람 이외에도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박제가(朴齊家, 1750~1805) 같은 당대의 의식 있는 학자들이 양반 사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양반 수의 급증이 조선을 내부로부터 약화하고 있음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특권적인 양반의 수를 엄격히 제한하고, 그 이외의 양반은 농업이든 상업이든 생업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매우 타당한 주장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양반의 특권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과거 시험을 엄격히 관리하여 부당한 합격자가 나오지 않게 했다. 그것은 양반에 대한 대책이 아니었다. 정조 말에 과거 시험 응시생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답안지를 제출한 인원은 3만여 명이었고 그중 제대로 된 답안지를 제출한 인원은 200명도 안 되었다. 즉 대다수가 양반 행세를 하느라 과거장을 들락거렸다.
     
정조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다. 다만 정조는 벼슬아치들의 기강을 잡는 데 주력했다. ‘문체반정’이 그것이었다. 문체반정이란 글을 바르게 쓰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분이고 실제로는 벼슬아치들에게 성리학을 항시 공부하라고 한 것이었다. 정조는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생각했다. 벼슬아치들이 민본 사상을 투철히 인식하여 통치한다면 백성이 잘사는 나라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이상이 통용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정조의 정책은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성리학의 이상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벼슬아치들의 기강을 어느 정도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불만 표출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는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근대로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중세의 이념인 성리학으로 대처하려던 것은 시대 역행적일 뿐이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사태가 급변하여 불과 10년 만에 홍경래 등이 난을 일으켰다. 정조의 선정(善政)에 가려졌던 백성들의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된 벼슬아치는 짐부터 검소하다.

정약용은 귀양살이하며 조선 사회의 민낯을 절절히 체험했다. 화약고가 되어가는 농촌 사회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직접 경험했다. 그는 ‘전간기사(田間記事)’라는 제목의 시에 붙인 ‘서문’에서 “기사년(1809)에 다산 초당에 있을 때, 아주 가물어서 겨울과 봄은 물론 입추가 되도록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땅이 천 리나 이어졌다. 6월 초가 되니 집 떠나 방황하는 백성들이 길을 메웠다. 마음이 아프고 그 광경이 참혹해서 살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라고 썼다. 농촌의 현실이 이렇게 참혹한데 벼슬아치들의 수탈은 그치지 않았다.
     
“승냥이여, 이리여!
우리 소 잡아갔으니,
우리 양은 건드리지 마라.
장 안에는 저고리도 없고,
옷걸이에 걸 치마도 없다.
항아리엔 남은 장도 없고,
독 안에는 남은 쌀도 없다.
무쇠솥, 가마솥 다 빼앗아가고,
숟가락, 젓가락도 모두 가져갔구나.
도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데,
어째서 착하지 못한가!”
   
정약용은 한 농민의 울부짖음을 이렇게 시로 기록했다. 등골을 빼먹는다는 말이 있다. 등골을 빼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이 죽는다. “우리 양”이라 표현된 한 농민과 그의 가족은 등골을 빼 먹히고 죽을 위기에 놓였다. 소를 잡아갔다. 그뿐인가. 농민의 가족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등골을 빼 간 것이다. 누가 그런 짓을 하는가? 지방의 벼슬아치들이다. 그들은 승냥이나 이리와 마찬가지인 짐승 같은 자들이다. “도둑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데” 왜 벼슬아치들은 그런 짓을 하는가?
     
정약용은 탄식했다. “조금이라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금 당장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 즉 글쓰기를 했다. 그는 1818년에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썼다. 1818년은 그의 귀양살이가 끝난 해다. 그는 귀양지인 강진에서 고향 집인 경기도 남양주까지 이 책의 원고를 싸 들고 갔다고 한다. 오랜 귀양살이 중의 탐구와 사색, 그리고 고민이 담긴 결실이기에 매우 소중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 벼슬아치들의 마음가짐부터 문제라고 했다. 벼슬아치들이 부임지에 갈 때부터 그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참된 벼슬아치라면 “행장을 꾸릴 때 의복, 안장을 얹은 말은 본래 있는 그대로 쓸 뿐, 새로 마련하지 않는다”고 했다. 짐을 쌀 때부터 검소하고 청렴한 마음가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짐도 간소하다고 했다. “이부자리와 베개, 그리고 솜옷”만 가져가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정약용은 책을 한 수레 싣고 간다면 맑은 벼슬아치라고 했다. 부임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려면 항시 연구해야 하므로 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요즘 수령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은 책력(冊曆: 책으로 된 달력) 이외의 다른 책은 한 권도 행장에 넣지 않는다. 임지에 가면 으레 많은 재물을 얻게 되어 돌아오는 행장이 무겁기 마련이니, 책 한 권도 부담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슬프다, 그 마음가짐의 비루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또 목민인들 제대로 할 것인가!”
   
탄식이 절로 나오는 현실이다. 부임지에 갈 때부터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부임지의 생활은 불을 보듯 훤하다. 많은 재물을 얻고자 하니 승냥이 짓, 이리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진짜 도둑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른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리사욕을 챙겼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매관매직이었다. 과거에 합격하려면 세도가에게 돈을 바쳐야 했다. 과거에 합격했다고 벼슬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벼슬자리를 얻으려면 다시 세도가에게 돈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수많은 돈을 바쳐 지방 수령 한자리를 얻었으니 본전 생각이 날 터. 지방 수령들은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양반이 늘어나면서 농민의 세금 부담이 커졌다. 정조는 벼슬아치들의 기강을 잡음으로써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막았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시작된 뒤로 기강이 급격히 해이해졌다. 돈을 받고 자리를 내준 것이기에 기강을 잡을 수도 없었다.
     
과중한 세금 부담 위에 벼슬아치들의 가혹한 수탈이 더해지면서 농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그래서 모든 것을 빼앗긴 농민들은 집을 떠나 방랑하거나 떼를 지어 도적이 되거나, 아니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참혹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정약용은 ‘갈의거사’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천하의 큰 도둑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갈의거사가 포승줄에 묶인 도둑의 팔을 잡고 “어찌 이런 욕을 당하느냐?”라며 통곡했다. 포졸이 그 까닭을 묻자 갈의거사가 말했다.
     
“지금 온갖 도둑이 땅 위에 가득하다. 토지에서는 재결을 도둑질하고, 호구에서는 부세를 도둑질하고, 굶주린 백성 구제에서는 양곡을 도둑질하고, 환곡 창고에서는 그 이익을 도둑질하고, 송사에서는 뇌물을 도둑질하고, 도둑에게서는 장물을 도둑질한다. (…) 지위가 높을수록 도둑질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녹봉이 후할수록 도둑질의 욕심은 더욱 커진다. 그러고서도 (…) 종신토록 향락하여도 누가 감히 뭐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굶다 굶다 좀도둑질 좀 한 사람이 이런 큰 욕을 당하니 슬프지 아니한가? 내가 이래서 통곡을 하는 것이지, 다른 연고는 아니다.”
   
이렇듯 정약용은 벼슬아치들의 수탈 행태를 낱낱이 고발했다. 벼슬아치들은 직위가 높을수록 더욱더 많은 수탈을 자행하면서도 평생 향락을 즐기며 산다고 했다. 그렇다면 벼슬아치와 굶주림에 지쳐 좀도둑질한 사람 중 누가 더 큰 도둑인가. 사실 좀도둑질한 사람은 벼슬아치들이 등골을 빼먹는 바람에 살길을 잃고 연명하기 위해 도둑질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약용이 벼슬아치를 나무라기 위해서만 《목민심서》를 쓴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행정, 입법, 사법의 전 분야에서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자세를 제시하기 위해 썼다. 당시 목민관이라 불렸던 지방 수령은 지방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한 손에 쥔 절대적 권력자였다. 따라서 지방 수령이 가져야 할 자세는 행정, 입법, 사법의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이 되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임명받을 때부터 퇴임할 때까지를 12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도리와 덕목을 제시했다. 그중에서 특히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등이 주목할 만하다. 그 세 편에서 정약용은 목민관의 기본 덕목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율기〉에서는 “바른 몸가짐과 청렴한 마음”으로 “절약”하고 “청탁을 물리치라”고 했다. 그리고 〈봉공〉에서는 “덕을 넓게 펼치고” “법을 지킴”과 아울러 “예로써 사람을 대하라”고 했다. “세금을 거두어들일 때는 부자부터” 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한 〈애민〉에서는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수재와 화재 같은 “재난에 최우선으로 최선을 다해 대처”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러한 덕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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