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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7. 2016

08. 스펜서 : 인간은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나뉜다?

<철학자의 조언>

사회진화론을 흔히 사회적 다위니즘(사회적 다윈주의)이라고 한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으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사회진화론은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사상이지만 다윈은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진화론의 내용은 다윈의 진화론과 별로 관련이 없다.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사람은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였다. 따라서 그가 사회진화론의 시조였다. 스펜서는 다윈보다 먼저 자신의 진화론을 발표했다.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은 1859년에 출간됐지만, 스펜서의 《진보의 법칙과 원인(Progress: Its Laws and Cause)》은 1857년에 발표되었다. 이 책에서 스펜서는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했다. 이것이 사회진화론의 출발이었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다윈의 주장이 여러 개의 진화론 중 하나일 뿐이었다. 유럽에서 진화에 관한 토론은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프랑스의 동물학자 라마르크(Jean Baptiste Lamarck, 1744~1829)는 유전 때문에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스펜서와 다윈이 살았던 19세기 중반에 진화라는 관념은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누구의 학설이 타당한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던 시기다.

     
스펜서의 진화론과 다윈의 진화론은 내용이 같지 않다.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후에도 스펜서는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스펜서는 다윈과 달리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했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이 타당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회적 다윈주의란 용어가 생겨났다. 사회진화론자들이 다윈의 명성을 ‘도용’한 셈이다.
     
사회진화론은 동서양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사회진화론은 주류적인 이데올로기였다. 서양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 세계를 문명과 미개로 구분하고 문명국가인 유럽이 미개 지역을 식민화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동양에서도 상당수의 사상가가 문명-미개의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에서 조선과 중국은 반미개의 상태라 규정짓고 일본만이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사회진화론이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개화 사상가들의 상당수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문명-미개의 논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미개한 조선 사람을 깨우쳐 문명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했다. 이런 주장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진화론의 영향력은 수그러들었지만, 스펜서의 사상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주류적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스펜서의 사상적 자산을 물려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1등 지상주의, 무한 경쟁이라는 구호 등에서 스펜서 사상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스펜서는 극단적 개인주의자였다.

스펜서는 살아생전에 영국의 경제적 번영과 공황, 그리고 제국주의로의 변모를 목격했다. 1870년대까지 영국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영국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영국의 철강 생산량은 전 세계의 절반에 이르렀고 석탄 생산량은 1억 톤이 넘었다. 1870년대에 영국의 대외 무역액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 국가의 무역액을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18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미국의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영국의 경쟁자로 등장했다. 영국은 더는 세계 일인자가 아니었다. 1880년대 이후 영국에서는 새로운 기술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낡은 시설로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독일과 미국에서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산업 생산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 결과 1900년에 이르면 독일의 철강 생산량이 영국을 앞지르는 등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명성을 잃게 된다.
     
또한, 1890년대 영국에 경제적 공황이 발생했다. 무수히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산업 생산이 감소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 확장을 통해 경제 위기를 해소하고자 했다. 식민지는 주요한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이었다. 1880년대부터 식민지를 확장한 영국은 공황이 발생하자 더욱 절실하게 식민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프랑스, 독일, 미국 역시 식민지 확보에 나서면서 국가 간에 크고 작은 분란과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본격적으로 식민지 확장에 나서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증대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정부의 권한은 더욱 비대해졌다. 영국의 국내 상황 역시 정부의 역할을 증대시켰다. 경제적 번영기에도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노동자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 심지어는 18시간 이상 비위생적 조건에서 일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최저 생계비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앞서 보았듯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당시의 영국 노동자들이 직면했던 비인간적 상황을 정부의 조사 자료를 인용하여 폭로했다.
     
노동자들은 노동협회, 노동조합 등 다양한 조직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뿐만 아니라 선거권 확보도 목표로 했다는 점이었다. 노동자들의 생활을 개선하려면 입법이 중요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선거권 확보 운동을 차티스트운동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재산을 가진 자에게만 투표권을 줬고, 그래서 노동자들은 투표권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1838년에 시작된 차티스트운동은 10여 년간 지속하였다. 그 성과로 1867년에 이르러 남성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정당들은 표를 얻기 위해 노동자의 요구를 부분적이나마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74~1880년 사이에 정권을 잡은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1) 정부는 공장법과 노동조합법, 그리고 보건위생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정부의 역할이 증대된다는 의미였다.
     
이렇듯 국내외적 상황으로 정부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스펜서는 이런 현상에 반대했다. 그는 극단적 개인주의자로서 정부를 불신했다. 정부가 하는 일을 시민에 대한 간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법령이 나오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 보았다. 심지어 정부가 운영하는 시설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원고를 우체국에 맡기지 않고 직접 인쇄소에 가져다줄 정도였다.
     
스펜서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자는 사상을 지지했다. 그는 정부의 역할이 “이웃의 침해로부터 각 시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 그리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개인과 전체 집단을 방어할 의무”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의 모든 일은 시민 개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정부의 역할은 야간에 도둑이 들지 않게 지키는 경비원의 역할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훗날 독일의 사상가 라살레(Ferdinand Lassalle, 1825~1864)는 그러한 국가를 두고 ‘야경국가’라고 이름 붙였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판된 이후 경제학자들은 기업가의 개인적 판단을 중시하여 정부의 개입에 반대했다.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스펜서는 진화론을 통해 정부 개입이 불필요함을 증명하려고 했다.
     
     

진화는 진보인가?

스펜서는 특이한 사상가였다. 그는 대개의 사상가와 달리 철학, 역사, 문학에 관해 광범위한 독서를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였던 콜리어는 스펜서의 서재에 대해 기록하기를, “그의 서재에는 철학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과학에 관한 서적도 거의 없었고, 역사 서적이나 전기도 없었다. 문학에 관한 책이라고는 로런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 한 권뿐이었다.”라고 했다.
     
스펜서는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썼지만 스스로 고백한 바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영어 문장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한 번도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그는 체계적인 학습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콜리어의 말처럼 스펜서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채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지식을 주로 채집한 곳은 잡지나 주변 사람들과의 토론이었다. 
     
스펜서는 채집한 지식을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사례로 활용했다. 1857년에 발표한 《진보의 법칙과 원인》 역시 그랬다. 이 책은 수십 쪽에 불과한 짧은 분량이지만 스펜서는 이 책에 자신의 진화론을 집약했다. 여기에서 스펜서는 채집한 자연과학의 성과를 사례로 진화의 법칙을 규정짓고 그 법칙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했다.
     
스펜서는 진화와 진보를 동의어로 사용했다. 이 점에서 스펜서의 진화론과 다윈의 진화론은 달랐다. 스펜서는 스무 살에 리엘(Charles Lyell, 1797~1875)의 《지리학의 제 원리(Principles of Geology)》를 통해 진화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동물학자 라마르크는 1809년에 발표한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에서 ‘용불용설(theory of use and disuse)’을 진화의 원리라고 주장했다. 생물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은 기관은 퇴화한다. 이때 발달한 기관이 유전되어 진화가 일어난다고 라마르크는 말했다. 라마르크는 모든 생물이 완성의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음을 주장한 것이었다. 스펜서는 그러한 경향을 진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다윈은 진화가 곧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생물이 상위로만 발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면 수많은 최하등의 생물이 존재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다윈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의 학설에 의한다면 하등 생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은 반드시 진보적 발달을 수반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만 그 복잡한 생활 관계 속에서 모든 생물에게 일어난 유리한 변이를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이 다윈이 주장한 진화의 원리다. 만약 진보한 생물만이 살아남는다고 하면 하등 동물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다윈은 환경에 유리하게 변이(變異)를 일으킨 생물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런 현상은 반드시 진보라고 할 수 없다.
     
다윈이 예로 든 마데이라 섬의 날개 짧은 딱정벌레를 보자. 마데이라 섬 부근에는 바람이 세게 분다. 그래서 날개가 길고 튼튼한 딱정벌레는 돌풍 때문에 바다에 떨어져 죽는다. 반면 날지 못하는 딱정벌레는 섬에 살아남았다. 환경에 적응한 딱정벌레가 살아남은 것일 뿐, 두 딱정벌레 중 어느 것이 더 진보했는지 따질 수는 없다. 날개라는 측면에서 보면, 마데이라 섬에서 살아남은 딱정벌레는 오히려 퇴화했다. 이렇듯 자연선택은 진보한 것이 아니라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것을 보존시킨다. 다윈은 진화와 진보를 동의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문명과 미개를 나누다.

스펜서가 말하는 진화의 법칙은 단순하다.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발전이 곧 진보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스펜서의 얘기를 들어보자. 
     
“유기체의 발전이 단순성에서 복잡성으로 가는 변화에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정설이다. 그래서 이런 유기체적인 진보의 법칙이 모든 진보의 법칙임을 주장할 수 있다. 이처럼 연속된 분화를 통해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가는 진화는 지구의 발전에서 생명의 발전, 혹은 사회ㆍ정부ㆍ공업ㆍ상업ㆍ언어ㆍ문학ㆍ과학ㆍ예술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게 적용된다.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주적 변화부터 최근에 나타난 문명의 결과까지 우리는 단순한 것들이 복잡한 것으로 변화하는 것에서 진보가 본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펜서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계의 생성, 지구・기후・식물・동물의 사례를 들었다. 동물의 경우를 보자. 스펜서는 다양한 지층에서 발견된 화석을 토대로 하여 “지질 시대가 후기로 접어들수록 더욱 복잡한 유기체가 진화되어 나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체 생물 종은 복잡성을 더욱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어류는 척추동물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파충류는 어류보다 이후에 출현해서 좀 더 복잡성을 띠고 있다. 포유류와 조류는 파충류보다 더 이후에 나타나서 더욱 심화한 복잡성을 띤다. 그런데 스펜서는 자신의 주장을 인간과 인간 사회에 적용하면서 무리한 짓을 했다. 먼저 인간에 대한 부분부터 보자.
     
“문명인의 사지(四肢) 발달이 미개인보다 (…) 더욱 멀리 진화했다. (…) 더욱이 문명인이 보여주는 능력의 범위가 더욱 넓고 다양하다는 점에서 판단하건대, 문명인은 미개인보다 더욱 복잡하고 정교한 신경 기능을 가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 더욱 유력한 증거는 모든 유아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인 유아들은 하등 인종과 닮은 점을 여럿 가지고 있다. (…) 그런데 이런 성질이 성인 유럽인의 형태로 바뀌는 발달 과정은 과거의 배아가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성장하는 변화의 연속이며 (…) 야만인과 비슷한 성질이 문명인의 것으로 바뀌는 과정도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가는 발달의 연속이다.”
    
스펜서는 인간을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나누었다. 유럽인이 문명인이고 미개인은 유럽인 유아 수준이라고 했다. 유럽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얘기다. 다음으로 인간 사회에 대한 설명을 보자. 스펜서는 이렇게 썼다.
     
“개별적인 형태의 인간으로부터 사회적인 형태의 인간으로 나아가는 데서 보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나가는 변화는 전반적인 문명의 진화에서도, 또는 부족이나 국가의 진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진화의 법칙은 문명의 진화에서도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스펜서는 유럽이 부족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발전해오는 과정을 서술했다. 그래서 유럽만이 문명사회에 이르렀고, 기타 지역은 여전히 미개사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결국, 스펜서가 진화의 법칙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하며 드러낸 것은 유럽과 유럽인이 문명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차등적 세계관이었다. 그런데 스펜서의 뒤를 이은 일부 사회진화론자들이 스펜서의 주장을 더욱 극단화했다. 그들은 유럽의 식민 지배가 미개사회를 진보로 이끌기 위한 문명의 전파라며 정당화했다. 더욱이 인종 차별마저 정당화했다. 이런 주장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이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극단적 주장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향력을 상실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1970년대까지 대부분 독립했다. 또한, 나치의 대학살을 경험하면서 인종 차별은 전 세계적으로 금기 사항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의 기초를 제공한 스펜서의 사상은 1980년대 이후 옷을 갈아입고 부활했다.
     
     

스펜서, 신자유주의로 부활하다.

스펜서는 정부의 빈곤 구제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사물의 자연적 질서하에서 사회는 병들고 열등하며 느리고 우유부단한 신념 없는 자들을 끊임없이 배제해나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 (정부의) 간섭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간섭은 정화작용(淨化作用)을 중지시킬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정화를 무효화시킬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 (…) 그것은 잡다한 무모하고 열등한 사람들을 (…) 격려하는 반면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 용기를 꺾는 것이다.”
    
스펜서는 진화론에 따라 정부의 빈곤 구제 정책을 비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병들고 열등하며 느리고 우유부단한 신념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지원하는 것은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용기를 꺾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곤 구제는 “정화작용”을 중지시키거나 무효로 하는 것일 뿐이다. 정화작용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간단하다. 빈곤은 개인이 열등하고 게을러서 생겨난 것이므로 정부가 구제해서는 안 된다. 스펜서는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외면한다. 부와 지위를 가진 자는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유능한 자이고, 가난한 자는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열등한 자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서 같은 얘기를 듣는다. 빈곤은 개인의 문제이므로 복지 정책은 불필요하다. 복지 정책은 빈곤한 자들을 게으르게 하고 도덕적으로 해이하게 만든다. 복지 정책은 낭비일 뿐만 아니라 자생적인 사회의 질서를 교란하여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 용어만 바뀌었을 뿐, 알맹이는 스펜서의 주장 그대로다.
     
스펜서의 사상이 일으킨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무한 경쟁이 절대적 상황으로 여겨지고, ‘살아남아야 한다’가 가장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또한 ‘1등 지상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스펙 쌓기’가 지상 과제가 되고 있다.
     
스펜서는 과학을 맹신했고 과학적 성과를 사회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과학, 특히 생물학을 사회에 적용하면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에서 출발했지만, 사회를 자연과 같은 자생적 질서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스펜서의 사상과 다르지 않다. 인간을 생존 경쟁에 내몰린 존재로만 인식할 뿐이다.
     
사회는 자연과 다르다. 사회는 인간이 활동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는 과학적 법칙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더욱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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