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Sep 27. 2016

07. 백인 남성의 지배에 도전장을 던지다!

<미술, 세상을 바꾸다>

오스카의 해부학적 정체-그는 백인이고 남성이다. 지금까지의 수상자처럼!


2003년 3월 1일,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릴 예정인 할리우드에 세워진 이 광고판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건장한 남성 모양의 금색 인물상인 오스카 트로피에 백인이나 흑인 같은 인종 구별은 없다. 그러나 이 광고판에는 뚱뚱한 백인 남성이 두 손으로 다소곳이 성기를 가리고 있는 트로피가 그려져있고 옆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있다.


여성이 감독상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각본상의 94퍼센트가 남성에게 수여됐다.
연기상 중 3퍼센트만이 유색인에게 수여됐다.

<오스카의 해부학적 정체-그는 백인이고 남성이다. 지금까지의 수상자처럼!>, 2003. ⓒ Guerrilla Girls


게릴라 걸스와 익명의 여성 영화제작자 그룹 앨리스 로카스가 만든 이 빌보드를 보노라면 아카데미상이 얼마나 백인 중심, 그중에서도 남성 중심으로 수여됐는지 알 수 있다. 이 광고판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게릴라 걸스는 각종 신문과 방송 인터뷰에 응하기 바빴고, 광고판 내용은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 광고판이 세워졌던 2003년에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이 모두 흑인에게 수여됐다. 흑인 여배우가 주연상을 수상한 건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이었다. 영화인들은 영화계 인종차별에 대한 게릴라 걸스의 비판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게릴라 걸스는 한 인터뷰에서 “수상 소식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산업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 왜 여성과 유색인은 오스카상에서 따돌림을 당하는가? 그것은 영화산업이 그들을 따돌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게릴라 걸스는 영화감독의 96퍼센트가 남성이며, 여성은 음향상과 촬영상을 수상한 적이 없고, 분장상조차도 남성이 85퍼센트나 차지했다고 밝혔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세 명의 흑인이 연기자상 후보에 올랐고, 74년 만에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이 흑인에게 돌아갔는데, 그것이 과연 기뻐할 만한 일인지 되묻고 있다.


미술계의 양심

1989년으로 기억한다. 뉴욕 시내를 오가는 시내버스 외벽에 특이한 광고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여자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가?”라는 카피와 함께 고릴라 마스크를 쓴 <오달리스크>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광고였다. 그 아래 좀 더 작은 글씨는 “현대미술 화가 중 여성 화가는 5퍼센트 미만, 그러나 누드화의 85퍼센트는 여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포스터 맨 아래에는 “게릴라 걸스-미술계의 양심”이라고 적혀있었다. 처음에는 포스터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흑인 여학생 친구의 열정적인 설명 이후 나는 게릴라 걸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여자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가?>, 버스 외벽 광고, 종이에 프린트, 1989. ⓒ Guerrilla Girls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집트와 그리스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1층과 2층에는 고대와 중세의 미술이 주를 이루고, 3층에는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현대미술 섹션이 있다. 여기에 전시된 작가 중 5퍼센트만 여성 작가의 작품인 반면 미술관 전체에 전시된 누드작품 중 85퍼센트가 여성 누드라는 것이 게릴라 걸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누드모델로 미술관에 들어가기는 쉽지만, 작가로서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소호 거리에서 자주 봤던 단색 포스터도 게릴라 걸스의 작품이었다. 그 포스터는 여성 작가들의 형편, 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 화단에서의 열악한 위치 등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몇 명의 여성 작가가 지난해 뉴욕의 미술관 에서 개인전을 가졌나?>, 1985. ⓒ Guerrilla Girls

게릴라 걸스는 이런 포스터를 화랑이 즐비한 소호 거리를 중심으로 맨해튼 남쪽 거리에 붙였다. 주로 한밤중에, 게시판이 합법이든 불법이든 가리지 않고 붙이고 다녔다.

<미국 여성의 수입은 미국 남성 수입 의 2/3. 여성 미술가의 수입은 남성 미술 가 수입의 1/3>, 1986. ⓒ Guerrilla Girls


<이 갤러리들에는 여성 화가의 그림이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10퍼센트 미만이다>라는 제목 아래 소호의 유명 갤러리 이름을 열거한 포스터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위 일급 화랑들, 메리 분, 레오 카스텔리, 말보로, 오일 앤 스틸, 페이스, 토니 샤프라지, 디아 아트재단 등이 줄줄이 열거되었다.

(위)<이 평론가들은 여성 미술가에 대해 충분히 쓰지 않는다>, 1985. (아)<이 갤러리들에는 여성 화가의 그림 이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10퍼센트 미 만이다>, 1985.


<이 평론가들은 여성 미술가에 대해 충분히 쓰지 않는다>라는 포스터에는 오늘날 현대미술을 이끈다는 비평가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있다. 이들이 여성 미술가에 대해 쓴 글은 전체의 20퍼센트에 못 미친다. 여성 미술가에 대해 전혀 쓰지 않았거나 그 비중이10 퍼센트 미만인 사람들은 이름 앞에 특별히 별표를 달았다. 이 통계는 1979년부터 1985년의 미술 전문 월간지와 「뉴욕 타임스」, 「빌리지 보이스」 등에서 얻었다고 포스터 하단에 밝히고 있다. 이처럼 여성 화가를 차별하는 미술계의 관행과 제도를 비판하고 나섰던 게릴라 걸스의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종차별 문제로 확대되었고 이어서 소수민족과 동성애 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까지 나아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08. 스펜서 : 인간은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나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