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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9. 2016

08. 이 깃발은 누구의 깃발인가?

<미술, 세상을 바꾸다>

하버드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그 학교의 상징인 문장(紋章, emblem)을 보았다. 월계수 가지로 둘러싸인 방패 위에 세 권의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책들에는 진리라는 뜻의 라틴어 VE RI TAS가 새겨져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데 매우 친숙한 느낌이었다.


그 후에 보게 된 예일 대학교의 문장 역시 하버드 대학교처럼 월계수 가지 에 방패와 책, 진리라는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예일 대학교 문장은 방패 위의 휘장에 라틴어 LUX ET VERITAS(진리의 빛)가 쓰여있다. 역시 어디서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서울대학교의 문장과 상당 부분 유사하기 때문이다.

태극기의 디자인은 동양사상에 기초하고 있고, 서울대학교의 문장(엠블럼)은 서양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한 나라의 국기와 그 나라 최고의 국립대학교 문장이 근본적으로 다른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경우는 한국뿐일지도 모른다.


서울대학교 문장에도 방패와 책이 있고, 책에는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의 라틴어 VERITAS LUX MEA가 쓰여있으며, 이를 월계수 가지가 둘러싸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방패 안에 서울대학교라는 한글 초성을 조립해서 만든 로고(열쇠 모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가 있고, 그 뒤로 횃불과 깃펜이 교차되는 것이다. 외국 유명대학교 문장들이 그토록 익숙하게 여겨진 것은 바로 거기에 책과 방패, 라틴어 VERITAS, 그리고 월계수라는 공통점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서울대학교 문장, 하버드 대학교 문장, 예일 대학교 문장



친척 중 누군가의 옷에 새겨진 서울대학교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중학생의 나에게 그것은 무조건적인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는 의아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최초의 의문은 거기에 적힌 낯선 언어에 대한 것이었다. 왜 난데없이 라틴어일까? 로마 제국의 번영과 함께 퍼져나가다 로마의 멸망과 함께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라틴어가 한국, 그것도 국립대학의 얼굴에서 왜 부활한 걸까? 선조들이 사용해온 한자라면 이토록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틴어는 세계화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학문적 전통과는 거리가 먼 언어이다. 진리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한자나 한글로 쓰는 것이 우리의 전통과 상식에 맞다.

월계수도 그렇다. 수양버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월계수는 한국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식물이다. 붓이 아닌 깃펜 역시 수 세기 전 서양화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고 방패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전통에서는 공부를 하는 학교 문장에 방패, 그것도 서양의 방패가 들어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의 전통은 무엇인가

다소 막연하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중 우연히 옥스퍼드 대학교의 문장 설명을 보고야 그 디자인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사용하는 옥스퍼드 대학교 문장은 1400년경부터 시작되어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 1993년에 수정, 지정된 것이라고 한다. 중앙에 있는 책은 지식의 보물 창고라는 의미이며, 그 위의 글은 ‘주는 나의 빛’이란 뜻의 라틴어이다. 시편 27장의 내용이라고 하는데, 요한복음의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에서 인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세 개의 왕관은 영국의 세 왕, 즉 예수 그리스도, 순교자 에드먼드 왕, 그리고 아서 왕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렇게 유럽이나 미국 대학교의 문장은 그들의 전통과 맞닿아 있고 기독교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대학들이 신학교에서 출발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위로부터) 옥스퍼드 대학교 문장, 서울대 문장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곳은 병원 간판이다.


(위로부터) 프린스턴 대학교 문장, 연세대학교 문장. 프린스턴 대학교 문장과 유사하다.



그런데 서울대학교는 신학교로 출발한 것도 아니고 그와 관련된 단과 대학도 없다. 서울대학교 안에서 도대체 누가 신을 수호하는 학문을 하며 누가 라틴어로 ‘베리타스’를 추구한다는 걸까?

1946년 8월 22일 서울대학교의 설립취지를 보면 “민족 교육의 기치 아래 민족 최고 지성의 전당이며, 민족 문화 창달과 세계 문화 창조를 위한 학문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국내 최초의 국립종합대학교로 설립”한다고 ‘민족’을 세 번이나 쓰며 강조하고 있으나, 정작 대학의 얼굴이라 할 문장에는 민족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스스로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한국의 문화적 종속 상태를 이만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해외 명품의 모조품, 이른바 짝퉁의 한 뿌리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서울대학교 문장은 생각하면 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그것은 한국에서 여전히 최고와 선망, 권위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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