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Oct 04. 2016

09. 서경덕 :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철학자의 조언>

황진이는 비록 기생이었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화려한 것을 싫어했다. 그리하여 비록 관가에서 주연(酒宴)이 있다 해도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화장하거나 옷을 꾸며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싫어하여 시정잡배 같은 자들은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았다. 선비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글을 좋아하여 당시(唐詩)를 읊었다. 일찍이 서경덕의 학문을 흠모하여 그 문하에 들어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지은 《송도기이(松都記異)》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출신을 따지지 않고 가르쳤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송도에 삼절(三絕)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서경덕이 “삼절은 무엇이냐?” 하고 묻자 황진이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저입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 서경덕이 크게 웃었다.
     
서경덕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 때의 사람이다. 중종은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을 반정으로 몰아낸 벼슬아치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반정(1506)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유생들이 다시 조정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연산군 때에는 두 차례의 사화, 즉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로 인해 유생들이 전원에 조용히 숨어 지내고 있었다.
     
중종 때 조정에 진출한 유생들은 유교의 도에 따라 정치를 하려는 열의를 가졌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였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조지서의 사지로 추천되었다. 조지서는 종이를 만드는 부서였으며 사지는 그 일을 맡아보는 벼슬이었다. 조광조는 추천을 거부하고 과거시험을 보아 홍문관에 들어갔다. 자기 스스로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홍문관은 왕의 공부인 경연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부서였다. 그래서 조광조는 자연스럽게 중종과 대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유교의 도를 설파하여 중종의 신임을 얻었다. 중종은 조광조에게 중책을 맡겼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조광조는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다. 벼슬의 품계를 무시한 초고속 승진이었다.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은거 중인 학자들을 대거 등용하게 했다. 또한, 기존 벼슬아치들의 기득권을 제어하기 위해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책봉된 105명 중의 76명의 공훈을 박탈하게 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종이 점차 조광조의 개혁 드라이브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를 이용하여 기득권 벼슬아치들이 역모 사건을 조작하고 조광조를 탄핵했다. 조광조를 비롯하여 조광조와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 죽거나 유배되었다.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을 기묘사화(1519)라고 한다.
     
이러한 시대에 서경덕은 살았다. 그는 일체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 조광조가 거듭 요청했음에도 끝내 거절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왜 그랬을까? 추천을 받아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의 처지가 불안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혼돈의 시기에 ‘기’만 있다.

서경덕은 쉰일곱 살이 되자 건강이 몹시 나빠져 살날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철학을 글로 남기는 일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의 짧은 논문을 작성했다.
     
서경덕은 이 논문들을 작성한 이유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논문들은 여러 성인이 다 전하지 않은 경지까지 이해한 것을 담고 있다. 중간에 잃어버리지 않고 후세 학자들에게 전해주고 온 세상에 두루 알리면 먼 곳에서든 가까운 곳에서든 우리나라에 학자가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원이기〉에서 서경덕은 자신이 가장 고심했던 핵심 주제, 즉 ‘혼돈된 때 무엇이 음양과 오행을 움직였는가’를 다루었다. 그의 설명을 보자.
     
태허는 맑고 형체가 없는데, 이를 일컬어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는 한이 없고, 그에 앞서는 아무런 시작도 없었으며, 그 유래는 추궁할 수도 없는데, 그 맑게 비고 고요한 것이 기의 근원이다. (…) 그 맑은 본체를 말로 표현하여 일기(一氣)라 한다. (…) 선천은 기이하고 기이하지 아니한가? (…)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 우주의 기틀이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선천’은 세상 만물이 탄생하기 이전 혼돈의 시기를 말한다. 그 시기에는 세상 만물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텅 비어 있다. 그래서 ‘태허’라고 했다. 그러나 그 빈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공간은 한 가닥의 털조차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기가 가득 차 있다. 단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 〈태허설〉에서는 “태허가 곧 기”라고 했다. 이 기가 바로 세상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면 누가 기를 움직이는가? 서경덕의 설명을 더 보자.
     
일기는 음과 양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일기가 음과 양을 낳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기가 스스로 움직인다. 일기라 했지만 일(一)은 이미 이(二)를 품고 있으며, 태일(太一)이라 했지만 일은 곧 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은 이를 생(生: 생성)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스스로 생하거나 극(克: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생하면 극할 수 있게 되고, 극하면 곧 생하게 되는 것이다. 기의 미세한 움직임에서부터 큰 진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생과 극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생성과 극복의 원리를 들어 기의 운동을 설명했다. 일은 이미 이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하나의 기에는 음기와 양기가 있으니 음기와 양기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생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음기와 양기는 모두 기이므로 하나의 기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것을 극복이라고 했다. 이렇듯 기는 흩어지고 뭉치는 과정을 계속한다. 그러면 어떻게 기가 흩어지고 뭉치는가? ‘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움직인다’고 했다.
     
세상 만물이 생겨나기 전 상태가 그렇다면 세상 만물이 생겨난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일기가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고 양의 극이 진동하여 하늘이 되었으며 음의 극이 모여서 땅이 되었다. 양이 진동된 끝에 그 정기가 엉킨 것이 해가 되었으며, 음이 모여든 끝에 그 정기가 엉킨 것이 달이 되고 나머지 정기가 헝클어져 별들이 되었다. 그것이 땅에 있어서는 물, 불이 되었는데, 이것을 ‘후천(後天)’이라 부르며, 곧 자연의 활동이 있게 된 것이다.
     
‘후천’이란 세상 만물이 생겨난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후천 때에도 선천 때와 마찬가지로 기가 운동한다. 하나인 기가 음과 양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 음과 양이 스스로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세상 만물이 계속 생겨난다는 것이다.
     
서경덕의 결론은 이렇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기뿐이다. 그 기가 스스로 흩어지고 뭉치는 운동을 하여 세상 만물을 창조했고, 또 계속 만들고 있다.

         

논쟁의 방아쇠가 당겨지다.

서경덕은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할 정도로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을 통한 출세를 거부하고 오로지 학문을 하며 살았다. 세상 만물의 근원을 밝히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고 사색과 탐구를 통해 기일원론을 제시했다. 서경덕은 기일원론을 담은 자신의 글을 제자들에게 건네주며, “천고(千古)의 의문을 풀었다.”고 자부했다. 성리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세상 만물의 근원을 밝혀냈다는 얘기였다. 성리학과는 다른 철학을 정립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경덕의 철학은 당시로는 ‘이단’이었고 위험했다. 훗날 선조가 “서경덕의 학문에 의심할 만한 것이 많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서경덕은 조심스러웠고 세상 만물의 근원을 밝히는 데서 멈추어버렸다. 그는 평생 교류했던 개성부학 교수 심의에게 “군자가 배움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멈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기일원론으로 조선 사회를 해석하고 비판하는 일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경덕은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조용히 은거하며 살았다. 달리 제목을 붙일 수 없어 ‘무제’라는 제목이 붙은 시의 한 부분을 보자.
     
눈에는 발을 드리우고 귀에는 문을 닫았지만,
솔바람 시내 소리는 더욱 뚜렷하기만 하구나.
나를 잊고 물(物)을 물(物)대로 보게 되니,
마음이 어디에 있든 절로 맑고 따뜻하구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그러나 세상 소식은 오히려 더 요란하게 들린다. 그러나 귀 기울이지 않고 물을 물대로 본다고 했다. 세상을 잊고 자연과 일체된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그렇게 나타냈다. 그러자 마음이 더욱 맑아졌다.
     
이렇듯 서경덕은 자연 속에 살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기록이 전해져온다. 그는 죽기 전 2년 동안 병을 앓았다. 그래서 자기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서경덕은 목욕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가 목욕하는 동안 한 제자가 물었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가 답했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오래전에 알았으므로 생각이 편안하다.”
   
서경덕은 삶과 죽음이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죽으면 기가 흩어져 다시 기로 돌아갈 뿐이다. 이 이치를 깨달았기에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이렇듯 서경덕은 조용한 삶을 살다 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철학은 논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서경덕보다 열두 살 아래인 이황은 서경덕을 비판하며 자기 철학을 정립했고, 이황보다 서른다섯 살 아래인 이이는 두 사람의 철학을 비판하며 자기 철학을 정립했다.
     
이렇게 하여 16세기 조선에서 서경덕, 이황, 이이에 의해 뚜렷이 구분되는 세 개의 철학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시작된 철학 논쟁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고, 조선의 학자들은 시대의 변화를 철학에 반영하기 위해 분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09. 근검하고 절약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