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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06. 2016

10. 회화의 역사는 벽화에서 시작되었다.(마지막 회)

<미술, 세상을 바꾸다>

                                                                     

구헌주, <자이언트 키드>, 부산 광남초등학교, 약 9x12m, 2012.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회화작품은 동굴벽화이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기원전 3만여 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류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고, 시각적 체험과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했으며, 그리는 것과 만드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미술은 표현에 있어 물질, 즉 재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문자로 이루어지는 문학이나 악기에 의해 표현되는 음악과 달리, 미술은 공기와 흙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근대 이후에는 문자나 소리까지)을 표현매체로 선택할 수가 있다. 

미술은 각 시대마다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채택한다. 흙과 도자기, 돌, 청동, 철, 그리고 오늘날 석유화학에 의한 첨단소재 등이 그것이다. 그것들이 인류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생각하면 물질과 함께 변화하는 미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종이의 발명으로, 서양에서는 캔버스와 유화의 발명으로 미술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종합해보면 미술에서 재료는 곧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안악 3호분>, 4세기 중엽 고구려 고분 벽화, 황해도.


15세기 ‘캔버스에 유채’라는 재료가 자리잡기 전까지 회화는 벽화 중심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와 그 이전의 회화는 주로 벽화이며,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이 모두 벽화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8~1511, 바티칸궁.


<신비의 집>, 79년 화산 폭발로 묻혔던 폼페이에서 발굴. 당시에도 수준 높은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졌다.


벽화는 근본적으로 공공적 성격이 강하다. 미술 후원인은 여러 사람이 볼 것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주문했으며, 화가도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림을 그렸다. 서양의 경우 중세 이전의 벽화는 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고, 프레스코 기법이 주를 이뤘다. 

르네상스 시기에 등장한 캔버스에 유채는 휴대성과 속도 외에도 그리기 편리하기 때문에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프레스코는 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고 날씨에도 영향을 받았다. 반면 유화는 시간에 쫓기지 않아 용이했다. 캔버스화는 작은 크기로도 그릴 수 있고, 이동도 편리했기 때문에 초상화 같은 개인적인 그림을 그리기에도 적합했다. 미술의 제작과 운반의 용이함이 미술의 보편화와 대중화를 촉진했다. 


공공성에서 멀어진 현대미술

미술이 본격적으로 사적 소유와 감상의 대상이 된 것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다. 왕실과 교회가 의뢰하는 공공적 그림이 줄어들고 새롭게 부상한 시민계급의 그림 수요가 늘어났다. 신흥 부르주아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지는 초상화와 인물화가 화가들의 주수입이 됐다. 이렇게 캔버스화는 공공성을 떠나 점차 개인의 관심을 담게 됐다. 

프랑스에선 미술 공모전인 살롱전이 생겼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진 회화의 경연장이던 살롱전은, 작가들이 자신의 솜씨를 세상에 알리는 출세의 기회로 활용됐다. 하지만 살롱전에서 입상하려면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따라야 했다. 19세기 초 미술계의 권력이자 주류였던 신고전주의자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급변하는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기득권층인 그들이 살롱전 심사를 비롯해 미술계의 권력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선호하는 형식과 내용을 따르지 않는 그림은 낙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그림은 그리스 고전 같은 고상하고 이상적인 그림이지,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에 이어 산업혁명이 닥치자, 시민들의 생활과 의식이 다양화되고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심사위원들의 과거의 고상한 미술 기준에 막혀 연이어 낙선했다. 당시 살롱전은 화가들의 등용문이었기 때문에, 연이어 낙선한 젊은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보여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마침내 살롱전에서 연이어 탈락한 작가들도 작품을 전시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의 특별 허가를 받아 열린 이 《낙선전》은 미술사에 오래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때 소개된 마네의 <풀밭 위의 오찬>은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살롱전에서 계속 고배를 마시던 모네,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등 젊은 화가들은 1874년, 마침내 자신들만의 독립 전시회 《인상파전》을 열었다. 그 첫 전시 역시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악평을 딛고 10년 동안 여덟 번의 전시를 개최하며 미술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인상파는 근대인의 눈으로 근대의 인물과 풍경을 그렸다. 이는 곧 모더니즘 미술의 발현이었다. 

도미에, <이 더러운 나라, 내 작품을 떨어트리다니!>, 1840. 도미에는 살롱전을 두고 화가와 관람객이 벌이는 갖가지 모습을 묘사했다.


도미에, <올해도 여전히 비너스군, 언제나 비너스야! 정말 저렇게 생긴 여자가 있기나 한가!>, 석판화, 1864.




모던아트의 진전과 변화

모더니즘 미술은 서양의 세계 지배와 함께 전 세계로 확대됐다. 모던아트는 과거 미술의 서사와 교훈을 버리고 새로운 형식의 개발에 몰두했다. 화가들은 스스로를 아방가르드라 부르며 끊임없이 과거 세대에 대한 반동을 추구했다. 이러한 급진성과 반동으로 20세기 미술계는 추상미술을 향해 달려나갔다. 

화가들을 추상으로 달려가게 한 배경에는 1839년에 발명된 사진술이 있었다. 사진은 그동안 회화가 담당해온 ‘사각틀을 통해 세상 보기’와, ‘3차원의 세상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는 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진은 회화와 경쟁을 시작했다. 사실적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사진은 회화를 능가했으며, 이러한 사진의 능력은 회화의 기능과 역할, 근본적인 존재 이유와 가치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사진과는 다른, 회화의 본질과 특성을 추구하는 화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회화의 본질적 요소인 점・선・면과 색채 자체에 집중했다. 그들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고, 미술로 이를 설명하고 증명하려 애썼다. 그것이 20세기에 대세가 된 추상미술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술은 점점 사회나 공공을 위한 것이 아닌 미술 자체를 위한 존재로 변해갔다. 이른바 ‘미술을 위한 미술’이었다. 

추상미술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진하는 사이 미술은 점차 미술과 미학에 높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미술은 대중과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미술은 그들이 만든 특별한 공간인 미술관과 갤러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현대미술은 그렇게 대중의 삶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때로는 대중에게 쉽게 이해되는 미술은 업신여김을 받기도 했다. 근대사회에서 미술은 더는 공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중반을 지나자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의 체제와 권위, 그 미학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새로운 기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됐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열망은 프랑스 파리에서 최초로 폭발했다. 1968년 학생・시민・노동자의 시위로 폭발된 68혁명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강대국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기반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68혁명의 현장에서는 계급 평등, 남녀평등, 내외국인 평등 등 온갖 차별과 수직적 계급의 철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런 요구들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드골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조르주 퐁피두가 대통령직을 이어받고 문제는 적당히 봉합되었다. 권력과 체제는 제대로 개혁되지 못한 채 수습됐고, 68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남았다. 

그러나 68혁명은 이후 정치, 사회뿐 아니라, 학문과 문화예술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난 백 년간의 모더니즘 체제 전반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이어졌고, 새로운 대안들이 제시됐다. 미술계에서도 모던아트의 지나친 개인주의, 엘리트주의, 상업주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이 불거졌다. 모던아트의 개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공공미술이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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