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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10. 2016

10. 마지막을 잘 관리하라. (마지막 회)

<제갈량처럼 앞서가라>

임종할 때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에 묻도록 유언했다. 산에 의지해 봉분을 만들고, 무덤의 크기는 관을 넣을 정도로 하고, 염할 때는 평소 입던 옷인 시복(時服)으로 하고, 기물(器物)은 쓰지 못하게 했다.

_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제갈량, 오장원에서 최후를 맞다.

제갈량은 지금의 섬서성 미현과 기산현의 경계인 오장원(五丈原)에서 진몰했다. 오장원은 현재 섬서성 기산현의 남쪽 20㎞ 지점에 있다. 이 지역은 폭이 약 1㎞에 길이는 약 5㎞에 달하는 산간의 평원지대이다. 북쪽으로 위수에 접하고 남쪽으로 태백산(太白山)에 가깝고, 동쪽은 깊은 계곡으로 이어져 있는 까닭에 예로부터 병가필쟁(兵家必爭)의 땅으로 여겨진 곳이다.
     
제갈량이 묻힌 곳은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이다. 당시 한중군 면양현 내에 있었다. 면양의 현성은 한고조 때 승상인 소하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면양현의 관할 구역은 현재의 섬서성 면현과 거의 일치한다. 정군산은 면현의 현성 남쪽 10여 리 지점에 있고, 제갈량의 묘가 그곳에 있다. 섬서성이 문화재로 지정해 놓았다.
     
정군산 양쪽의 봉우리에 끼어 산 정상은 완만한 경사로 이뤄져 있다. 군사 1만 명 가량을 주둔시킬 수 있어 정군산(定軍山)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제갈량의 묘는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묘 앞에는 명나라 만력 22년인 1594년에 세워진 ‘한승상 제갈무후지묘’라고 쓰인 석비와 청나라 옹정 13년인 1735년에 세워진 ‘한 제갈무후지묘’라는 석비가 나란히 서 있다.
     
그간 제갈량이 왜 전쟁이 벌어진 정군산에 묻히기를 원했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해석이 나왔다. 혼령이 되어서라도 촉한을 지키려 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통용됐다. 실제로 제갈량 묘의 본전 정면에 걸려 있는 무명씨의 대련(對聯)이 이를 웅변한다.
     
살아서는 유씨를 일으켜 한나라 왕업을 받들고(生爲興劉尊漢業)
죽어서는 촉한을 지키기 위해 정군산에 묻히다(死猶護蜀葬軍山)

     
이 대련은 제갈량의 충의를 잘 드러내고 있어 21세기 현재도 널리 회자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제갈량이 자신에게 쏠리는 여러 의혹을 피하고자 정군산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논거는 다음과 같다.
     
“당시 제갈량은 커다란 권력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의혹의 눈길이 많았다. 조그마한 것에도 주의를 기울인 제갈량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이런 유언을 남기게 된 것도 사후에 유선 및 여러 신하에게 의심을 받지 않으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갈량 사망 당시 추모하는 백성들이 모두 그의 사당을 세우고자 했을 때 촉한의 조정이 이를 수용하지 않은 사실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제갈량은 죽을 때 남에게 털어놓지 못한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후에 자신에게 쏠릴 의혹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정군산에 묻힐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존재했다는 주장이 그렇다. 논거는 이렇다.
     
“제갈량의 죽음은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당시 강유나 비의 등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군을 침착하게 후퇴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마의는 이미 제갈량의 죽음을 알고 대군을 이끌고 추격해왔고, 촉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게다가 촉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갈량의 관을 성도까지 무사히 호송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가까운 장소에 묻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제갈량 역시 죽을 때 자신을 정군산에 장사지내면 철군에 따르는 손실을 최대한 피할 수 있고 철군 시간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음이 틀림없다.”     
     


평소 입던 옷으로 염을 하고, 무덤의 크기는 작게 하라.

제6차 북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게 가장 설득력이 있다. 특히 제갈량이 자신을 염할 때는 평소 입던 옷(時服)으로 하고, 무덤의 크기는 관을 넣을 정도로 작게 만들라고 당부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 비록 죽을 때의 상황은 다르기는 하나 조조가 죽을 때 자신을 염할 때 평상복(時服)을 쓰고, 금옥진보(金玉珍寶)는 묘에 넣지 말라고 당부한 것과 취지를 같이한다. 
     
사자(死者)에 대한 겉치레의 융숭한 장례로 인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한 것이다. 특히 제갈량의 경우는 자기 죽음으로 인해 살아 있는 장병들이 사마의 군사의 추격으로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병사들을 사랑하는 애사심(愛士心)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니체 (Nietzsche, Friedrich Wilhelm)


니체는 “어떤 이들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태어난다”고 했는데 제갈량의 죽음은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죽은 지 2천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중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역에서 아직도 그를 흠모하고 존경한다. 제갈량은 살아서는 일인자를 보좌하는 이인자의 역할을 평생에 걸쳐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이제는 위대한 이인자가 아니라 일인자보다도 뛰어난 지혜의 신이자 인간적 신의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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