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을 지배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이렇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운이라는 것은 사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떤 방법으로 감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수면 아랫부분이 압도적으로 큰 빙산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호흡하는 이 세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보다 훨씬 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차피 알 수 없으니 보이는 부분만 합리적으로 계산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빙산에 충돌하는 배처럼 언젠가 어딘가에서 반드시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이성을 발휘하여 분석하거나 계산하거나 추론할 수 없다. 오직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 외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지식이나 정보에 상당히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이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성 앞에서 본능은 뒷전이다. 하지만 이성에 지나치게 편중된 삶의 방식은 다양한 폐해를 초래한다.
본래 사람은 이성 이전에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성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인간관계든 업무든 뭐든지 합리적으로만 계산하면, 인간관계는 삭막해지고 업무는 융통성이 없어진다. 스트레스 사회의 원인은 애써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려는 데에 있다. 감각은 그에 대한 폐해나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각을 갈고닦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는 ‘직감’을 꼽을 수 있다. 프로 장기기사 하부 요시하루[羽生善治] 씨는 “직감으로 파악하는 것의 70퍼센트는 타당하다”고 했지만, 나는 ‘90퍼센트’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내리는 판단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직감이다. 직감을 예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작업, 즉 생각을 의도적으로 버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비운 채로 대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직감으로 느껴진 것이 내면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운은 겉으로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 즉 흐름과 타이밍, 기회와 분위기, 의식하기 힘든 감정의 움직임을 얼마나 감지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직감과 운의 관계는 그만큼 밀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