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일간의 엄마>
문제없어. 우리는 셋이서 행복해질 거야. 셋이 사는 선택.
치료 방침도 정해졌다.
수술 → 항암제 → ‘출산’ → CT・MRI → 항암제 탁산 → 방사선 치료.
피하유방절제 수술은 성공했다지만 재발할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가슴은 사라지고 없었다.
퇴원하면서 항암 치료가 시작됐다.
실은 ‘임신 중에 항암제를 투여하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까’에 관한 데이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도 연구는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항암제가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답을 찾아가는 치료일 수밖에 없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투여하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도가 크다. 상황을 봐가면서 통상보다 감량하여 항암제를 투여해나갔다.
양이 적어서였는지 고맙게도 이 무렵에는 항암제 부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5월 20일에 수술하고, 퇴원하고 나서 아이가 태어난 10월까지 다섯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 집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최근 집을 정리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육아 잡지가 나왔다. 나오는 줄곧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물론 불안한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다섯 달 남짓한 기간은 나오에게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으리라. 아니, 그랬길 바란다. 여행도 다녀왔다. 임산부 사진도 찍었다.
이 5개월이 없었다면……. 이 5개월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오가 너무 애처롭다. 그런 인생이면 안 된다.
우리 두 사람은 니시가와 의원과 크리훔 푸우 리츠코 머터니티 클리닉에 빈번히 다니며 검진을 계속 받았다.
“괜찮습니다. 배 속의 아기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우리 둘이 기뻐한 게 몇 번인지.
항암제는 2주에 한 번씩 투여받았다. 항암 치료는 힘들다는 인식이 있지만 나오에게는 자신이 건강해지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오는 늘 밝은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만약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쇼핑이라도 가는 줄 알았을지 모른다.
나오는 항상 자신의 어머니와 동행했다. 나중에 장모님이 말씀하시길, “나오를 낳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오와 가장 가까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라고 하셨다. 나오에게는 너무 슬픈 일이지만 마지막 효도였는지도 모르겠다.
탄생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오사카 마라톤 대회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결혼한 해, 피로연 이후 처음으로 참가한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 이번이 두 번째 참가였다.
남성 듀오 ‘고부쿠로’의 구로다 슌스케와는 초・중학교 동창이기도 해서 같은 멤버인 고부치 겐타로 씨와도 사전 합동 연습을 해오던 중이었다. 여기에는 뉴스 캐스터로서 오사카 거리의 열기를 피부로 느끼며 전달한다, 그리고 「ten.」을 띄운다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또 내게는 ‘결혼한 해에 첫 마라톤’ 그리고 ‘나오가 애쓴, 아들이 탄생하는 해’에 참가한다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달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 달리고 싶었다.
나는 열의를 불태우며 연습했다. 내가 출전하는 제4회 오사카 마라톤 대회 날짜는 10월 26일. 한편 나오와 나의 보물 — 아이가 태어날 예정일은 10월 23일이었다. 나오를 위해서도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질 수 없다. 나는 피곤한 몸을 채찍질하며 시간 날 때마다 달렸다.
10월 23일. 그날이 왔다.
셋이서 행복해지자고 다짐한 지 반년. 나는 아침부터 기분이 들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래는 자연분만을 할 예정이었는데 초음파 진단 결과, 아이 목에 탯줄이 세 바퀴나 감겨 있어 제왕 절개를 하게 되었다.
실은 제왕 절개를 하기로 결정 났을 때 조금 안심했다. 자연분만을 한다면 예정일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정일일 뿐이다. 하지만 제왕 절개를 하게 되면 날짜와 시간을 정할 수 있고, 그러면 좀 더 빨리 다음 치료며 CT 같은 정밀한 검사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나오 몸에 더 이상 상처를 남기긴 싫었지만, 무사히 출산한 후에 바로 유방암 치료에 들어갈 수 있다. 들뜬 마음 뒤로 나는 한시라도 빨리 본격적인 치료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을 위해…….
제왕 절개라서 분만실에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나와 부모님들은 니시가와 의원의 별실에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실에 생일 축하곡이 흘렀다. 그리고 간호사가 갓난아이를…….
“건강한 남자아이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이어서 눈물이 나왔다. 울면서 웃었다. 온 가족이 활짝 웃으며 서로서로 “다행이야” 하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오가 얼마나 애썼는지, 그건 가족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괴롭다’느니 ‘무섭다’느니 하는 말을 내비치지 않는 나오였지만, 그런 나오의 노력은 가족 모두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수술은 잘됐고 모자 모두 이상은 없었다. 좀 지나 나오가 분만실에서 나왔다. 일생일대의 큰일을 해낸 나오에게 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속삭였다.
“고생 많았어.”
그리고 사흘 후, 나는 나오한테서 같은 말을 듣는다.
“고생 많았어요.”
나는 아내가 출산한 지 사흘 후, 오사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완주했다. 어딘가에서, 가족을 위해 달리고 있었던 내게, 나오의 그 말은 무엇보다 기뻤다.
하지만 달리고 있던 때부터 내 머릿속을 덮고 있던 불길한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레이스 도중, 내 눈에선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실은 불안에 짓눌리고 있었던 거다.
아들의 탄생을 이미 프로그램상으로도 보고한 터라, 레이스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필시 ‘기쁨의 눈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은 달랐다. 애써준 아내이자 엄마인 나오에게 고마운 동시에 너무 불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