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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5. 2016

05. 김훈이, 의사 가운 대신 조리복을 입다.

<학력파괴자들>

어머니, 저는 요리사가 되고 싶습니다. 의대는 그만두겠습니다.

의대 졸업을 1년 남겨둔 시점, 김훈이는 어머니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아들을 말렸다. 남편을 잃고 두 살 때부터 홀로 키워온 외아들이었다. “안 된다. 넌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곧바로 뉴욕의 요리학교에 등록했다.
     
김훈이 셰프는 열 살 때 어머니를 따라 뉴욕으로 건너왔다. 지극히 모범생이었던 그는 과학을 좋아해 과학고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미국에 건너온 다른 한국 부모들처럼 아들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고, 그는 어머니의 뜻도 따르고 본인도 의사가 되어 많은 이를 도와주고 싶어 의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일을 해보니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에게는 점차 ‘성공’도, ‘훌륭한’ 의사가 될 자신도 사라져 갔다.
     
지나친 스트레스 탓에 집에 있을 때조차 두려움이 엄습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심한 두통에 시달렸던 그는 마침내 휴학을 택했다. 아무래도 몸을 추스르고 잠시 쉬어야 할듯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쉬는 동안 평소에 관심이 있던 요리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 요리학교에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두통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요리는 힘들지만 즐거웠다. 늘 자신을 엄습하던 두려움이 이제는 식당에 가고 싶다는 설렘으로 바뀌었고,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이참에 현장 경험도 쌓아보고자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세 개를 받은 세계적 명성의 프랑스 레스토랑 대니얼(Daniel)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3개월간 임금을 받지 않을 테니 일을 시켜달라고 했고, 대니얼 측은 흔쾌히 받아줬다. 그런데 그의 요리 실력을 본 관리자는 2주가 지나자 ‘보수를 줄 테니 정식직원으로 일해달라.’고 제안해왔다. 대니얼은 무보수 인턴지원자만 수백 명에 이르는 꿈의 레스토랑이다. 그가 기뻐하며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루에 16시간을 서서 하는 일이 바로 요리입니다. 그런 요리 일을 하는데 나 자신이 행복하더라고요.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는, 평생 할 일이라면 나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세상의 의견 대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주위의 편견은 예상대로 극심했다. 의대를 그만둔다고 하자 어머니는 1년간 아들과 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그는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신혼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아내를 두고 혹시 ‘사기 결혼을 당한 것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다행히 대형 로펌의 변호사였던 아내는 그를 이해해주었다. 아내 역시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며 살지 못하고 있던 터라 남편만큼은 행복한 일을 하기 바랐다. 장래가 보장된 의사라는 직업을 그도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내가 행복할 수 없고 결국은 아내도, 가정도 행복해질 수 없어요. 남의 눈을 의식해서,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나의 인생을 희생할 수는 없었어요. 나의 인생이니까.”
   
대니얼에서 일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손님으로 찾아오셨다. 대니얼은 마치 귀족을 대접하듯 고객에게 정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직원 가족에게는 특히나 서비스가 극진하다. 완벽한 음식과 서비스를 받은 어머니는 ‘네가 요리를 좀 하는가 보구나.’ 하며 칭찬과 승낙의 뜻을 비쳤다. 그가 요리를 시작한 이후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대니얼에서 2년간 통과의례를 거친 후 김훈이는 역시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셋을 받은 일식 레스토랑 ‘마사(Masa)’에서도 2년간 일했다. 28개 좌석에 요리사만 열 명, 저녁 식사 비용이 1인당 500~800달러에 이르는 마사는 미국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 중 한 곳이다. 대니얼과 마사를 거치며 김훈이는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재료들을 모두 만져봄은 물론 요리에 대한 창의력과 빠른 스피드, 섬세함 그리고 정통(正統)의 중요성까지 배웠다. 이제 자신만의 요리를 세상에 내놓을 때가 오고 있었다. 
    

 

뉴욕에 한식 별을 띄우다.

의사의 길을 접고 요리사가 되기로 한 이상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졌다. 그는 매년 한국의 할머니 댁에 가서 먹는 음식들이 무척 맛있었던 것과 달리 뉴욕에서 먹는 한식은 대개 별맛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뉴욕의 한식당 대부분이 먹고사는 데 급급해 한식의 본래 맛을 버리고 현지와 타협한 음식을 만들었다. ‘한국 음식은 양 많고 저렴하다.’는 세간의 인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한식을 고급화해 새롭게 내놓기로 했다.
     
2010년 맨해튼 헬스키친(Hel’'s Kitchen) 식당가에 36개 좌석의 아담한 ‘단지’를 오픈했다. 한국 산골 마을에서 된장, 고추장 등 전통 한국 장을 공수해와 한식 맛을 그대로 살렸다. 메뉴는 잡채, 부대찌개, 은대구 조림 같은 정통한식과 더불어 햄버거 빵에 불고기와 제육볶음을 넣은 요리 등의 퓨전 한식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오픈한 지 다섯 달이 지나자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뉴요커들이 식당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12년에 한국식 주막 ‘한잔’을 열었다. 놀랍게도 ‘50세주(백세주와 소주를 섞은 술)’와 막걸리, 어묵탕, 떡볶이, 순대, 짜장라면 같은 한국의 대표 간식에 뉴요커들이 환호를 보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 음식을 서구화한 음식점으로는 후니 킴의 ‘한잔’만 한 곳이 없다. 후니 킴의 요리를 탐험한다면 큰 기쁨을 얻을 것.”이라며 ‘한잔’을 뉴욕 10대 레스토랑으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2013년 한식 세계화 홍보대사로 임명된 김훈이는 케이푸드 월드 페스티벌(K-Food World Festival)의 심사를 맡고, 케이블 채널의 인기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마스터셰프 코리아’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며 엄격하지만 따뜻한 심사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셰프를 일컬어 ‘행복을 나누어 주는 직업’이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행복한 사람만이 행복을 전할 수 있다. 부모의 뜻이 아닌 자신의 가슴이 이끄는 일을 선택한 그는 진정 행복한 셰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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