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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5. 2016

03. 광야에서 성으로 돌아간 재규어

<당신은 유일한 존재입니까>

스와치는 저가 시계 시장이라는 광야에서 승부를 걸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광야에서 힘을 잃었다면 자신만의 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훌륭한 전략일 수 있다.

     
명품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Jaguar)와 랜드로버(Land Rover)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극적인 여정을 거쳐야 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브랜드였지만 영국을 떠나 독일과 미국 자동차회사의 품을 전전해야 했으니 말이다. 랜드로버는 독일 BMW에 팔렸다가 다시 미국 포드에 넘어갔고, 재규어는 반대로 미국에 매각되었다가 독일 BMW에 팔렸다. 미국과 독일의 자동차회사들은 이 전통의 브랜드를 마치 핑퐁 게임을 하듯 서로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롤러코스터 같은 운명의 종착지는 같은 곳이었다. 두 브랜드 모두 2008년 인도의 타타(Tata) 자동차에 매각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동차 선진국인 미국과 독일도 살려내지 못한 재규어와 랜드로버가 인도로 넘어가자 이 두 브랜드는 끝장났다고 여겼다. 타타가 인수하기 전 기록한 11조 원의 적자는 더욱 절망적인 앞날의 예고편인 듯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기 전에 사람들은 거리에서 세련되고 날렵한 자동차를 목격하게 된다. 그 차들은 놀랍게도 절망스러운 미래를 선고받았던 재규어와 랜드로버였다. 디자이너인 이안 칼럼과 제리 맥거번에 의해 새롭게 디자인된 모습에 소비자들은 열광했고, 미운 오리 새끼였던 재규어랜드로버(Jaguar Land Rover Limited, JL)는 무려 3조 원의 영업이익을 올린 백조로 화려하게 비상했다. 지난 10년간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들의 부활을 진두지휘한 이는 오랫동안 재규어에 몸담았던 랄프 스페스였다. 그런데 새로이 CEO로 임명된 스페스의 전략은 새롭고 신출귀몰한 것이 아니었다. 스페스의 전략은 단 하나, ‘성으로 돌아가라!’였다. 매각이 반복되는 동안 여러 브랜드의 간섭을 받으며 자신의 색깔이 흐려지고 정체성이 모호해진 재규어는 ‘포드의 엔진과 섀시에 껍데기만 재규어를 뒤집어씌운 차’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스페스는 제 모습을 잃어버린 재규어랜드로버가 돌아가야 할 성의 이름을 분명히 했다. 그 성의 이름은 ‘영국스러움과 최신 공학기술’이었다. 자신의 성을 되찾아야만 부활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사람들은 간과했지만, 재규어랜드로버에 희망적인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일이나 미국 자동차와는 차별되는 점에 매력을 느낀 마니아들이었다. 독일의 명품 자동차 3사인 벤츠, BMW, 아우디는 기업의 CEO,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이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재규어는 도전적이고 모험적이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피족[yuppies, 젊은(young), 도시화(urban), 전문직(professional)의 머리글자인 yup에서 나온 말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은 도시인을 일컫는다.]이 선호한다는 독특한 이미지 영역을 독점하고 있었고, 이 마니아들은 브랜드가 추락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팬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 자동차가 성공한 계급의 표상이었다면, 재규어는 자유와 진보, 도전의 상징이었다.
     
재규어가 진행한 재미있는 실험은 그들이 어떤 시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다. 재규어는 두 개의 방을 만들었다. 한쪽 방은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신진 작가의 미술 작품으로 채우고, 다른 방은 고풍스럽고 정갈한 고전 작품으로 채운 뒤 고객들을 초청해 마음에 드는 방으로 들어가 달라고 요청했다. 
     
재규어의 고객들은 대부분 파격적인 작품이 있는 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공학박사 출신인 랄프 스페스는 그간 오만했던 태도를 버리고 세계 각지의 소비자들이 지닌 특성과 요구사항을 반영해 트렌드에 맞는 새로운 재규어를 만들어나가는 한편, 재규어가 지켜야 할 ‘진보적인 프리미엄’ 이미지를 다시 살려내는 데 주력했다.
     
재규어랜드로버를 인수한 타타그룹은 럭셔리 자동차의 특성이 있는 재규어랜드로버를 자신들이 직접 경영할 수 있다는 오만을 부리지 않았다. 타타는 재규어랜드로버가 본 모습을 제대로 회복할 수만 있다면 이 브랜드를 추종하는 마니아들이 부활을 도울 것을 알았기에 경영은 전적으로 스페스에게 맡기고 디자인은 이안 칼럼 등 영국의 전통을 이해하는 디자이너에게 일임했다. 
     
브랜드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도가 높은 두 기둥에 성을 되찾아올 임무가 맡겨짐으로써 재규어랜드로버는 자신만의 독창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결국 부활했다.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제 모습을 되찾는 것은 나만의 성에서 나만의 고객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첫 번째 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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