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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6. 2016

02. 女風당당, 금녀의 벽을 허물다._강금실 법무장관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참여정부 들어서면서 공무원 사회도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남성 위주의 독점적 위계질서가 구조화된 공직사회에서 민주성과 다양성이 중시되는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로 거듭난 것이다. 그 변화의 바람은 참여정부의 ‘균형인사정책’(Affirmative Action)에서 시작됐다. 여성과 장애인, 이공계·기술직 공무원들에 대한 배려를 통해 ‘인사가 만사’가 되기 위한 조건을 서서히 갖추어 가게 된 것이다.

청와대와 중앙인사위원회에 각각 균형인사비서관실과 균형인사과를 설치하고 여성 인사수석을 발탁한 참여정부는 역대 정부 중에서 ‘여성’을 ‘균형’ 있게 대우한 ‘최초’의 정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검찰로 다시 태어나기 바란다.

“검찰의 이기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확실한 지휘관이 돼야 한다. 능력뿐 아니라 상징성도 필요하다. 나는 절대로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 없다. 법무부는 더 이상 검찰을 위한 법무부가 아니라 문민화가 돼야 하며, 검찰도 제도적인 독립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검사동일체 원칙이 없어져야 한다.”

2003년 2월 7일, 대통령직인수위 정무분과 인사추천회의 당시 노무현 당선자가 남긴 말이다. 이미 이때부터 파격인사의 복선이 깔린 게 아니었을까?

2003년 2월 27일. 이틀 전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직접 내각 인선 배경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김각영 현 검찰총장보다 무려 11기 아래 후배이자 판사 출신의 여성을 법무부장관에 기용한다고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법무부장관 발탁 원칙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법무부에 관해서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로 잡으려고 한다. 법무부를 검찰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지금까지는 검찰이 법무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검찰과 법무부의 역할이 다른 만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이제 더 이상 법무부가 검찰의 입장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 이는 검찰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40대 변호사를 법무부의 장관으로 발탁하는 것은 파격이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부처 장악력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 법조계의 서열주의에 구속되지 않으려 한다. 법무부장관이 몇 기든 검찰은 소신을 지키길 바란다. 법무부장관이 검찰의 권위나 독립성을 결코 훼손시키지 않을 것으로 본다. 과거는 권력의 검찰이었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검찰로 다시 태어나기 바란다.” 

그렇다. 사법고시 기수가 조직의 골간인 검찰조직을 흔들면서까지 ‘강금실 카드’에 담고자 했던 노 대통령의 핵심 메시지는 바로 서열 파괴를 통해서라도 검찰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무부의 비정상적 상태를 반드시 바로 잡아 시대적 사명인 검찰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강금실은 여성1호 형사단독판사(1990년), 여성1호 로펌 대표변호사(2000년), 벤처전문 로펌1호 설립(2000년), 여성1호 민변 부회장(2001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아시아 차세대 지도자(Asian Young Leaders) 한국대표 18인 중 유일한 법조인(2002년) 등 ‘여성1호’를 달고 살았다.

인터넷에는 강 장관이 제주 출생인 것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등록기준지(구 본적)이다. 중등학교 교감을 지낸 아버지의 살림살이가 궁핍해지면서 경북 경주로 이주해서 2남 4녀 중 막내인 금실이를 낳았다. 어렸을 때 상경한 그는 경기여고 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큰 고민 없이 1975년 서울법대에 들어갔으며 1981년 2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황덕남 참여정부 초대 법무비서관(23회), 국민의당으로 4선에 성공한 조배숙 의원(22회), 여성1호 대법관이자 국민권익위원장을 지낸 김영란 변호사(20회)가 모두 경기여고 63회·서울법대 동기생들이다.

1981년 7월 10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 강금실 합격생은 자신의 적성이 법관이 맞는지 오랜 고민 끝에 가족들의 권유로 4학년부터 고시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교내 탈춤반 활동을 하면서 사회현실에 눈뜨기 시작했고, 사회과학 서적도 꾸준히 읽었다. 서예에 조예가 깊은 부친의 영향으로 붓을 잡기도 했다. 이는 훗날 ‘인권변호사 강금실’을 만들어낸 토양이 되기도 했다.

1983년 판사에 임용된 그는 1996년 판사직을 그만둘 때까지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전두환 정권 시절 서울 남부지원에 근무하면서 시위를 하다 즉심에 회부된 대학생들을 줄줄이 석방했다. 1991년 서울 북부지원 형사단독판사 시절에는 화염병 투척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한국외대생을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김용철 대법원장의 도중하차를 불러온 1988년의 2차 사법파동 당시 명단을 올린 강금실 판사는 1993년 3차 사법파동 때도 ‘평판사회의’ 설립을 주도하며 김덕주 대법원장에게 소장 판사들의 ‘사법개혁 건의서’를 올렸다.

강금실 판사는 1988년 사회과학출판사 ‘이론과 실천’ 대표인 남편 김태경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 출판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현직 신분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장문의 의견서를 검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재학 시절부터 서울법대 선후배 관계로 사귀었던 정통 운동권 출신의 김태경과 강금실 판사는 1984년 결혼에 골인했다. 현직 판사인 신부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경력이 있는 운동권 출신 신랑의 결합은 당시 법조계에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남편의 사업 실패로 2000년에 협의 이혼을 했고, 장관이 된 뒤에도 이때 떠안은 빚 때문에 마이너스 9억 원 이상의 재산으로 고위공직자 중 꼴찌를 기록했다.

1996년 서울고등법원을 그만둔 강금실 변호사는 개업과 동시에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가입했다. 그리고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고발을 주도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 덕분에 입회 5년 만에 여성 1호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사업수완도 남달랐다. 2000년 국내 최초로 벤처기업 컨설팅 전문 법무법인 지평을 설립, 불과 1년여 만에 변호사 60여 명을 거느린 중견 로펌으로 키워내는 경영능력을 발휘했다. 주로 M&A, IT, 지적재산권 등을 맡은 지평은 국내 10위권에 랭크돼 굴지의 로펌으로 성장했고, 강 대표도 월 1,500만 원의 소득을 신고했다.

발탁 인사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중립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검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이번 대통령 인사의 방향이고 원칙적 방향입니다.”

1년 5개월 동안 재직한 강금실 법무부장관은 적지 않은 개혁성과를 내놓았다. 중요한 것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법무부 개혁 작업의 시발점이 된 정책위원회와 정책기획단을 구성해 운영했다. 검찰 인사위원회 운영 개선, 검사 단일호봉제, 재정신청 확대, 보호감호제도 개선 등 민감한 개혁 안건들이 다루어지고 상당수가 법무부 정책으로 채택됐다. 이 조직은 훗날 천정배 장관이 검찰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검찰 인사개혁을 실시했다. 취임 초 김각영 검찰총장 사퇴를 촉발한 파격적인 검사장 인사는 사실상 청와대가 주도했지만, 부장검사 이하는 강 장관이 고유의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는 파격을 넘어 가히 혁명적이었다. ‘지방에서 한직만 전전해온 숨은 진주’를 발굴해 서울지검 특수1부장과 형사1부장에 발탁했고, 주로 서울로만 돌던 귀족 검사들을 지방으로 내쫓았다.

인사개혁과 관련해 강 장관이 남긴 발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2003년 3월 초 법무부의 ‘인사지침’ 파문과 관련, 서울지검 평검사들까지 나서서 “밀실에서 진행하고 있는 검찰인사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인사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 부득이하게 직접 개입하게 되었고, 덕분에 그 유명한 ‘검사와의 대화’가 이뤄지게 됐다.

2003년 3월 9일 노 대통령은 전국 평검사 50명을 직접 면담, 검찰 인사 문제와 독립성 및 중립성 보장을 위한 제도개혁 방안 등에 관해 공개토론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강금실 장관은 놀라운 사실을 공개했다.
“검찰인사를 관리하는 검찰국장을 불러 검사장급 인사자료를 요구했더니 인사기록자료와 참고자료 등 2개 파일을 가져왔다. 그런데 거기엔 학력, 고향, 경력만 있고 사건 처리 과정이나 공정수사 등의 업적은 전혀 없었다. 그동안 장관이 혼자 인사를 했던 것이다. 업무수행능력과 도덕성 자료는 전혀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에게 검찰개혁을 맡겨도 좋을 만한 이유는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했다. 인사협의 때문에 이날 저녁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참여정부 장차관 국정토론회 만찬장에 뒤늦게 참석한 강금실 장관에게 노 대통령은 ‘철의 여인’이라고 부르며 힘을 실어주었다.

“발탁 인사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중립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검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이번 대통령 인사의 방향이고 원칙적 방향입니다.” 

노 대통령이 2003년 3월 강금실 장관에게 내린 인사지침 중 일부이다. 강 장관은 대대적인 양심수 사면을 실시하고 ‘준법 서약제’를 폐지했다. 광복절을 기다리지 않고 취임 두 달 만에 시국사범 1,400여 명을 석방 또는 사면했다. 장관 취임사에서 밝힌 개혁의 방향대로 일선 검사들이 소신껏 수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검사동일체원칙’을 폐지했고, 소외된 소수자들의 인권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도 없애버렸다. 그 결과 2003년 네이트닷컴의 인터넷 검색 정치 부문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경실련의 장관 업무수행능력 평가에서도 우등상에 해당하는 7등을 차지했다.

‘여성 판사’ 출신인 강금실 법무부장관은 나름대로 검찰개혁을 추진했지만 대표적인 검찰권력 견제장치인 ‘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실패 등 근본적인 ‘수술’은 하지 못했다. 검찰 출신들은 여타 조직에 비해 자신의 조직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국회에서도 검찰 출신 의원들 때문에 ‘사법개혁안’이 좌절된 사례가 부지기수다. 19대에 이어 20대 총선에서도 검찰 출신 국회의원은 무려 15명이 진출했으니 이들의 저항을 뚫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검찰개혁은 아직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제2, 제3의 강금실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법무법인 ‘원’의 고문 변호사로 등록돼 있는 맹렬 여성 강금실은 이제 본업보다는 지구 살리기 운동가로 깜짝 변신해 있다. 법조계 복귀 이후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 등록해 종교와 과학, 생명 등을 다양하게 공부했고 2012년에는 《생명의 정치》라는 에세이집도 출간했다. 생태정의와 4대강 사업, 물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마련 등 다양한 지구환경 전도사로 나섰다. 2015년 11월에는 21차 파리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개막을 앞두고, 국내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기후위기 극복을 염원하는 1,000인 선언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여성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지만 국회의원과 장관 등 권력의 영역에 여성을 할당하려는 노력이 참여정부 이후 중단됐으며 경제시장에서의 성별 격차가 큰 것이 원인이다. 성 평등 지수가 낮아지면 그만큼 국가경쟁력도 낮아진다는 연구결과는 셀 수 없이 많다.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행한 적극적 조치로서의 균형인사정책은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는 선견지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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