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후 생존자를 위한 지식>
종말 후에 남은 식량으로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 걱정 없이 식사를 계속할 수 있을까?
포장지에 쓰인 유통기한은 일종의 지침에 불과하며, 품질의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기한을 너무 짧게 표시해둔 경우가 많다. 그럼, 다양한 유형의 식품을 얼마나 오랫동안 실제로 먹을 수 있을까? 소금과 간장, 식초와 (건조된 상태의) 설탕 등이 함유된 식품은 실제로 무한정으로 보존될 수 있을까?
우리 식단을 주로 차지하는 식품들은 슈퍼마켓의 선반에서 금세 상하기에 십상이다. 예컨대 신선한 과일과 채소는 수 주 지나지 않아 썩고 시들겠지만, 덩이줄기는 겨울 동안 에너지를 저장하도록 진화되었기 때문에 훨씬 오랫동안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원하고 건조한 곳, 특히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 보관된 감자와 카사바와 얌은 6개월 이상 그런대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치즈를 비롯한 간편하게 식탁에 내놓을 수 있도록 이미 조리된 조제 식품들은 수 주가 지나지 않아 곰팡이가 피기 시작할 것이다. 또 서너 달이 지나면, 정육점의 포장되지 않은 고깃덩어리들이 부패해서 T자 형태의 뼈와 갈빗대만이 남을 것이다. 달걀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고 쉽게 손상되지 않아, 냉장하지 않고도 한 달 이상 먹을 수 있다.
생우유는 일주일 이내에 상하겠지만, 초고온 처리되어 테트라팩에 포장된 우유는 수년 동안 유지되고 분유는 훨씬 더 오랫동안 유지된다. 건조식품도 산패되면 지방이 먼저 상하기 때문에, 무지방 분유를 가장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 라드(돼지비계를 정제하여 하얗게 굳힌 것 ― 옮긴 이)와 버터는 작동이 중지된 냉장고 안에서는 금세 상하고, 조리용 기름도 시간이 지나면 산패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길 것이다. 인간이 섭취하기에는 부적절한 상태가 되더라도 조리용 기름의 지방 성분은 비누나 바이오디젤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
흰 밀가루는 수년 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기름 함유량이 훨씬 많아 금세 산패되는 통밀가루보다 더 오랫동안 보관된다. 건조된 국수 같은 밀가루 제품도 수년 동안 보관된다. 곡물은 빻거나 가루로 만들지 않으면 내부의 미생물이 습기와 산소에 노출되지 않아 영양분이 훨씬 풍부하게 보존된다. 따라서 가루로 빻지 않고 낟알로 보관된 통밀은 수십 년 동안 영양분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다.
옥수수도 알갱이 상태로 보관하면 약 10년 동안 영양분을 유지하지만, 옥수숫가루의 경우에는 보존 시간이 2~3년으로 떨어진다. 쌀알도 건조하면 5~10년 동안 너끈히 보존된다. 따라서 건조된 상태로 시원한 곳에 보존된 식품이 종말 후에도 남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온대지역의 대형 슈퍼마켓 내부를 둘러보면 이런 추정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후텁지근한 기후권에 살고 있다면 전력망이 끊어져서 에어컨의 작동이 멈추는 순간부터 식품이 부패하기 시작할 것이다. 냉장고와 냉동고가 작동하지 않으면, 식품이 부패하는 시큼한 냄새가 쥐와 벌레 등 많은 약탈자를 유혹하기 마련이다.
물론 애완견을 비롯한 굶주림에 지친 예전의 반려동물들도 떼 지어 달려들 것이다. 따라서 잘 포장된 식품들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여지없이 찢겨날 것이므로, 생존자들에게 남겨진 식량자원은 초기 문명의 곡물 창고처럼 유통기한보다는 해로운 동물에 의해 훨씬 더 많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압도적으로 막강한 보존식품은 슈퍼마켓의 선반들을 가득 채우며 끝없이 진열된 통조림 식품일 것이다. 장갑차처럼 튼튼한 포장은 종말 후에 들이닥칠 해충과 벌레의 공격을 너끈히 견뎌낼 것이고, 통조림을 만드는 과정에 가해진 열처리로 인해 내부의 미생물이 완전히 살균되어 내용물이 완벽하게 안전하게 보존된다.
겉에 찍힌 ‘유통기한’은 종말이 일어난 뒤로 2년여에 불과하겠지만, 대부분의 통조림 제품은 그 제품을 제조한 문명이 붕괴한 후로 한 세기까지는 아니어도 수십 년 동안은 너끈히 보관된다. 통조림에 녹이 피고 움푹 찌그러진 곳이 있다고, 내용물이 누출되었거나 부풀었다는 증거가 눈에 띄지 않으면 내용물이 부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당신이 널찍한 슈퍼마켓을 독점한 생존자라면 그 물건들로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부패하는 식품부터 먼저 소비하고, 그 후에는 상대적으로 강한 덩이줄기 식물 및 말린 국수와 쌀에 눈을 돌리고, 가장 확실한 보존식품인 통조림 제품은 마지막에 손을 대는 것이 최상의 전략일 것이다.
또한, 비타민과 섬유질을 적절하게 먹으며 균형식을 꾸준히 유지하려면(건강보조식품이 진열된 곳을 이용하면 된다), 몸집과 성별 및 활동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하루에 2,000~3,000㎈가 필요하다. 평균적인 규모의 슈퍼마켓 하나를 완전히 독점하고, 개와 고양이 먹이로 개발한 통조림까지 먹는다면 대략 55~63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슈퍼마켓 한 곳을 독점한 한 명의 개인에서 재앙 후에 전국에서 보존식품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생존자 전체로 계산을 확대하거나, 작은 구멍가게에서 거대한 유통 창고로 계산을 확대하면 규모가 커지는 건 당연하다.
영국 환경식품농무부(Department for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 DEFRA)가 2010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주변 환경에 서서히 반응하는 식료품’(쌀과 말린 국수 및 통조림처럼 부패하지 않는 미냉동식품)이 영국 전역에 11.8일 치 비축되어 있다. 재앙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어 약 1만여 명이 남는다면, 그 비축량으로 생존자들이 50년가량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술 문명을 신속하게 다시 시작하기에 충분한 공동체가 되려면, 농업을 회복시켜 식량을 자체 생산하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보장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