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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1. 2016

08. 인체의 신비를 밝혀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1510년 10월 21일 레오나르도와 공학가들은 밀라노 대성당 건축위원회로부터 성당 내 성가대석에 관한 자문을 받았다. 몇 달 후 레오나르도는 단단한 흰 돌에 관심이 생겼으며 친구인 조각가 베네데토 브리오스코가 그 흰 돌에 대한 견본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다양한 인위적인 물질을 생산하는 것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가공하지 않은 호박(amber)을 대체할 만한 물질에 관해 생각했다. 그는 합성수지에 관해 연구하면서 “나는 플라스틱 유리를 발명했다”라고 적었다. 나이가 들었지만 과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고 말년의 실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했으며 자신의 비법을 비밀에 붙였다. 그는 단순히 기계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생의 본질에 관한 유기적 구조에 집중했다. 정기적으로 뼈와 해골 또는 가죽을 벗겨 낸 인체를 통해 근육과 신경조직에 관해 연구했다. 

레오나르도, <사람 두개골에 관한 연구>, 19×14cm


피렌체에서 <안기아리 전투>를 위한 습작을 할 때 그의 작업장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병원 내에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인체를 해부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는 늙은이와 아이의 사체 해부에 관해 노트북에 상세히 열거했다.

백 살이나 된 늙은이가 죽기 몇 시간 전 자신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는 않지만 쇠약함을 느낀다고 말하고 산타 마리아 노벨라 병원 침대에 앉아 미동도 없이 조용히 죽었다. 그렇게 조용히 죽을 수 있는 연유를 알아내기 위해 노인의 시체를 해부했는데, 그 원인이 심장으로부터 뻗은 동맥을 통해 피가 몸 전체에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서 쇠약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다음 해부는 두 살 된 아이였는데 이 경우 늙은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기록을 통해 레오나르도가 의학 역사상 처음으로 동맥경화에 관한 기록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체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목을 매달아 죽은 시체의 경우 성기가 충혈되어 있었다고 적었으며, 이런 기록에 드로잉을 첨가했다. 노트북에는 “시체가 아주 가늘게 된 원인은 병인데, 근육이 사라져 세포막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아마도 암이었던 것 같다. 그는 파비아 대학 해부학 교수로 젊고 영리한 의사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르레의 도움으로 인체에 관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인체 외에도 동물에 관해서도 연구했는데 곰, 원숭이, 소, 개구리와 조류 등을 인체의 내부와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동물의 생명의 본질에 대해 알고 싶어 했으며 인체의 각 부분이 어떤 상호관계를 유지하는지 알기 원했다. 그의 기록을 보면 인체에 관해 발견한 성과에 대해 매우 열광적으로 기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심장·폐·두뇌·간·장·목·얼굴을 해부 분석하면서 창조주의 교묘한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매료되었다. “창조주는 불필요하거나 불완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창조하지 않았다”고 적었고, “상이한 점을 발견하기 위해” 사체 여러 구가 필요했다고 적었다. 그는 피가 엉기고 창자, 몸속의 근육이 서로 얽혀 있어 최소한 세 차례에 걸친 해부가 필요했다면서 “그 밖의 것들은 폐기하더라도 정맥과 동맥은 제대로 분별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힘줄·근육·인대를 위한 해부, 뼈와 연골을 위한 해부가 필요했다고 적었다. 여성의 인체 해부를 통해 인간이 태어나는 과정을 밝히고 싶어 한 그는 “자궁과 태아라는 대단한 신비를 숨긴 여인”을 속속들이 밝히기 위해 세 차례의 해부가 필요했다고 하고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듯이” 모든 특징을 세 가지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모양으로 보여줘야 했다고 적었다. 그는 임신 7개월째인 태아를 그렸지만 임산부의 사체를 구하지 못했으므로 태생학에 관한 연구는 소의 자궁을 기초로 했으며 피의 순환과 함께 외생식기의 기능과 자궁의 발전을 연구했다.

레오나르도, <여인의 주요 장기와 동맥 구조>, 1500년경, 수채, 47.8×33.3cm



레오나르도는 해부용 칼과 톱으로 인체의 내장을 분해한 후 각 장기들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흐르는 물에 씻거나 석회수에 담근 후 주사기로 액체 왁스를 투입시켜 내부 모양을 재생하고 펜이나 연필로 보이는 그대로 그렸다. 이렇게 그린 인체 묘사가 2백여 점이나 된다. 과학적 가치가 높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많이 그린 예가 과거에 없었고 이것들은 18세기 말까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받았다. 드로잉에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골상학, 근학, 심장학, 신경학을 발견했다. 인체 내부를 그대로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안다면 그가 이룬 성과가 매우 값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의 연구는 대단한 신비를 벗겨 내는 작업이었다. 근육과 팔다리 힘줄에 관해 연구하면서 “1510년 겨우내 이 모든 해부를 마쳤으면 한다”라고 적었다. 마지막 해부학의 성과는 호흡 체계와 성대에 관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를 존재의 기원인 영혼에 관한 연구의 준비 작업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그는 지혜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의 축적을 통해 존재의 본질이 되는 영혼을 알고자 했는데 “자연은 무한한 원인들로 되어 있어 경험이 결코 자연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성의 중량, 즉 모든 것의 규칙과 한계에 압도되었다.

추기경 조르주 앙부아즈는 레오나르도에게 파리 근교의 가이롱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을 새로 디자인해주기를 청했다. 교황 후보로 선출되지 못한 그는 밀라노의 총독 샤를 앙부아즈의 삼촌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그의 청을 거절했고 대신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안드레아 솔라리오가 그 일을 맡았다.

이 시기 레오나르도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다. 루도비코가 타계했고, 보티첼리가 피렌체에서, 그리고 조르조네가 1510년에 타계했다. 그해 추기경 앙부아즈가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3월 10일에는 샤를 앙부아즈가 세상을 떠났다. 전하는 말로는 그가 교황으로부터 파문된 후 화병으로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 원인은 말라리아였다. 레오나르도에게 해부학을 가르친 의대 교수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르레도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밀라노에 새로 부임한 루이 12세의 조카인 총독 가스통 드 퐈는 1511년 부활절 날 라벤나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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