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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1. 2016

05. 영원한 정치적 사부_김원기 정치고문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다른 국회의원들은 믿을 수 없으니 대표님께서 확실하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신당이 제대로 되는 것 아닙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조용하지만 단호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4월 2일 국정연설에서 “2004년 총선에서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에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처럼 파격적인 정치개혁안이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은 물론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으로부터도 거부되자 그가 유일하게 믿고 상의할 수 있는 김원기 고문을 불러 드디어 ‘개혁신당’의 필요성을 촉구한 것이다. 어엿한 당 상임고문 또는 개혁특위 위원장이라는 공식 직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김원기 의원을 여전히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당선되면 본격적인 정치개혁과 민주당 개혁에 착수하겠습니다. 국민과 당원의 뜻을 모아 신당을 창당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당의 문호를 전면 개방하겠습니다. 새 정치에 뜻을 함께하는 젊고 유능하며 도덕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새로운 인재들을 적극 영입해서 당의 면모를 일신하겠습니다.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는 전국통합정당을 건설하겠습니다.”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2002년 12월 17일 공식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틀 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2월 22일에는 정동영·신기남·천정배 등 초·재선의원 23명이 당 쇄신책의 하나로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후 민주당은 쇄신의 방향을 두고 구주류와 신주류의 피 튀기는 싸움이 전개됐다. 구주류는 동교동계가 중심인 민주당 의원을 모두 끌어안고 외부에서 플러스알파를 수혈하자고 주장했다. 이들 대부분은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일 때 그를 흔들거나 끌어내리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후단협(후보단일화협의회) 출신도 적지 않았다. 반면에 한화갑 대표를 퇴진시킨 신주류는 1인 보스정치를 뛰어넘는 정당개혁, 고비용 저효율을 극복하는 정치개혁, 지역주의를 타파하는 전국정당 등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독자신당’을 제안했다.

정대철 당대표, 김원기 개혁특위 위원장 등 신주류 중진들은 당초 ‘당 분열 불가론’ 입장에 서 있었다. 소장 개혁파들인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은 더욱 강경했다. 이들은 모두 호남 출신이거나 김대중 총재로부터 공천장을 받아 야당 강세지역에서 당선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3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송금특검법을 공포하면서 구주류는 격앙했고 4월 재·보궐선거에 신주류가 개혁당의 유시민 후보를 연합공천하면서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신주류와 구주류는 이제 공식적으로 갈라서기 위한 수순만 남긴 상태였다.

이후 과정은 독자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다. 5월 16일 신주류 측이 김원기 의원을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 의장으로 선출하면서 민주당은 격랑에 휩싸였다. 7월 7일 이부영·이우재·김부겸·김영춘·안영근 등 이른바 독수리 5형제라 불리는 한나라당 개혁파의원 5명이 탈당을 결행했다. 이들이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구호로 내걸고 신당 합류를 선언하며 독자신당은 급물살을 탔다. 그리고 9월 4일 민주당 당무회의장에서 발생한 우연한 폭행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민주당 분당은 대세로 굳어졌다. 구주류 측 여성 당직자인 문팔괘 부위원장이 당무회의 석상에서 신주류 측 이미경 의원에게 “한나라당에서 오면서 당에는 100원짜리 한 장도 안 낸 사람!”이라고 외치며 목걸이와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이 장면은 그대로 TV화면과 신문에 생생하게 보도됐고, 이는 엉뚱하게도 분당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결국 민주당 소속 의원 40명은 당을 탈당,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 5명과 개혁당 의원 2명과 함께 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초대 당의장으로는 김원기 의원이 선출됐다.

김원기 당의장은 1996년 11월 9일 통합민주당 비주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상임대표(공동대표 장을병 전 민주당 대표, 송기숙 전남대 교수, 신경림 시인, 유창우 영남대 총장)를 맡았다. 총회 의장에 이철 전 의원, 사무총장에는 제정구 의원이 임명됐다. 이 밖에도 현역의원으로 이수인·김홍신·이미경 의원이 참여했고, 전직 의원은 노무현·유인태·원혜영·홍기훈·박석무·김원웅·황의성 등 개혁파 성향이 강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고문으로는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박형규 목사, 백낙청 서울대 교수, 박찬석 경북대 총장, 김진홍 두레공동체운동본부대표가 위촉됐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을 통해 “망국적 지역할거정치를 극복하고 지역·계층·세대 간 대립과 갈등을 치유, 21세기 민족통일시대와 정보화 사회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15대 대선 1년여를 앞두고 각계를 망라한 3,000여 명의 창립발기인을 모은 통추는 지역주의 극복과 정치개혁을 통한 정권교체를 목표로 삼았다. 맹목적인 3김 청산만을 부르짖는 이기택 총재의 통합민주당 주류 측과는 입장이 달랐고, 그래서 분열의 책임이 있는 국민회의 DJ를 포함한 야권 재통합운동을 과제로 내걸고 전국 강연에 나섰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원기 통추 대표의 첫 만남은 1988년 13대 국회에서다. 노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초선의원이었고 김원기 대표는 평민당 원내총무였다. 13대 당시 평민당에는 권노갑 의원 외에는 국회에 진출한 동교동계 인사가 거의 없었다. DJ는 하는 수 없이 10~11대 의원을 거쳤으나 12대 총선에서 낙선해 공백기를 거친 김원기 의원을 원내총무로 발탁, 도박을 시도했다. 당시는 5공 청산과 광주문제 해결이 가장 큰 과제였다.

솔직히 동교동 가신들은 김원기의 지둘러(기다려의 전북 사투리) 스타일을 보고 그 능력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헌정사상 처음 맞이한 여소야대 정국이긴 했지만 야당끼리도 은근한 경쟁의식이 있는 터에 노선 차이까지 극복하고 제1야당 주도로 야당 공조체제를 구축하기란 쉽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소수파 여당인 민정당을 설득하는 것도 보통의 인내로는 안 됐다. 요즘 같으면 몸싸움과 장외투쟁이 숱하게 벌어졌을 만한 일들을 김원기 총무는 민정당 김윤환 총무와 느릿하지만 끈질긴 협상 끝에 TV생중계 청문회까지 관철해냈다. 결과적으로 5공 청문회 스타로 노무현 의원이 등장한 배경에는 김원기 총무의 숨은 공로가 매우 컸던 셈이다.

정치 초년생 노무현 의원은 1988년 11월 17일부터 사흘 동안 진행된 일해재단에 대한 2차청문회 당시 가장 ‘핫’한 인물이었다. 그는 증인들을 호되게 꾸짖지 않고 존중하면서도 차분한 논리로 신문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을 상대로 정곡을 찌르는 질의를 함으로써 생방송을 지켜보던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원기는 1980년부터 8년 동안 ‘광주사태’로 매도돼온 광주항쟁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승격시킨 주인공이다. 그는 김윤환 총무를 상대로 끈질긴 협상을 벌여 1988년 7월 13일 마침내 국회 안에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두 야당은 핵심부분인 발포명령과 관련해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을 현장 총지휘자로 지목했다. 그런데 정호용은 김윤환 총무의 경북중·고 동기동창생이자 현직 민정당 의원이었다. 정호용은 육군참모총장과 내무·국방 장관 등 5공 실세로 잘나갈 때 친구인 김윤환의 인사를 챙겨 문공부차관, 청와대 정무1수석 등으로 밀었다. 더욱이 과천시 장군마을의 한 빌라 아래윗집에서 한동안 같이 살기도 했다. 개인적인 의리를 내세우며 눈물 바람으로 호소하는 김윤환을 설득한 김원기는 끝내 1988년 11월 14일과 12월 7일 정호용을 광주특위 청문회 증인으로 세웠다.

김원기 총무는 1989년 3월 21일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는 대신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한 정호용 등을 공직에서 사퇴시키는 내용을 담은 비밀각서를 김윤환 총무와 작성했는데, 그는 2008년에야 이를 공개했다. “내 손으로 친구를 사퇴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제 쉬게 해주십시오.” 6공화국의 안착을 위해서였지만 친구를 저버린 김윤환은 1989년 8월 30일 이한동 총무로 교체됐다. 정호용은 1989년 12월 29일 의원직과 민정당 대구경북위원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노무현-김원기 두 사람의 공식적인 인연은 1991년 9월부터 시작된다. 이해 6월 실시된 광역의회 선거에서 참패한 DJ가 꼬마민주당에 6대 4로 파격적인 지분통합을 제안하면서 단일야당인 민주당 합당이 성사됐다. 이때부터 김원기 의원은 통합된 민주당의 사무총장, 노무현 의원은 대변인으로 호흡을 맞췄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듬해의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천심사위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김원기는 김대중계, 노무현은 이기택계 공심위원이었으나 계파를 떠나 당선 가능성 위주로 공천심사를 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나갔다.

DJ가 14대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 뒤 실시된 1993년 3월 전당 대회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김원기는 수석최고위원, 노무현은 5순위 최고위원이었다. 당시 노 최고위원은 계보나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전체에 지장을 주는 일을 하지 않았고 자기 이익을 선뜻선뜻 잘 버렸다. 보통 구태정치에 익숙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다른 계보 사람의 경쟁력이 나아 보여도 외면하고 자기 계보의 이익을 지키는데, 노 최고위원은 객관적으로 자기가 민 사람 또는 의견에서 하자가 발견되면 선선히 버리는 용기가 있었다. 또한 노무현 최고위원은 김원기 최고위원이 비록 DJ계를 대표하는 입장이었지만 합리적이고 옳은 의견을 제시할 경우 이의 없이 수용해주는 것을 보고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압승을 하자 DJ는 국민회의 분당을 통해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김원기 최고위원은 14대 총선 당시 ‘DJ’를 선택하면 부산에서 떨어질 줄 알면서도 야권 통합을 위해 민주당에 합류한 노무현, 김정길이 있는 민주당을 이유 없이 버릴 순 없었다. 호남에서도 중진의원 한 명 정도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DJ는 당을 깨고 나가면서 명색이 수석최고위원인 그에게 일언반구 사전 상의도 없었고, 무조건 따르라는 말뿐이었다.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김대중 총재를 따라가지 않으면 국회의원 되기가 어려울 게 뻔했지만, 가족들도 모두 그의 소신에 찬성했다. 그의 부친도 소신대로 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여론조사를 해보니 당선 가능성은 30%도 채 되지 않았다.

당시 부산시장에 출마해 초반 승기를 놓친 노무현 후보는 DJ의 지역등권론과 국민회의 분당을 “역사의 주인인 국민 대중을 졸(卒)로 보고 정치발전을 가로막는 지역대결 구도의 부활”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김원기 최고위원 역시 이때만큼은 ‘지둘러’가 아닌 신속한 결단을 내렸다. “한 사람이 결정하면 모두가 따라나서는 졸(卒)의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 신당 창당은 대의에도, 국민적 도리에도 맞지 않다.” 하면서 호남 맹주 DJ에 맞서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예상대로 15대 총선에서는 이들을 포함, 민주당에 잔류한 개혁정치인들은 대부분 낙선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15대 대선 한 달 전 “정권교체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라며 국민회의에 복귀할 때까지 통추를 이끈 김원기 상임대표는 노 대통령에게 영원한 ‘대표님’이 됐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현역의원은 천정배 의원 단 한 명뿐이다. 그러나 이는 공개 지지의 경우이고 경선 시작 전부터 김원기 의원은 물밑에서 노무현-김근태 단일화를 추진했다. 개혁진영 단일후보 결집을 통해 이인제 대세론을 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경쟁력에서 우위에 있는 노무현이 더 낫다고 판단했고, 제주 경선장에 이재정 의원을 보내 김근태 후보에게 사퇴 권고까지 했다. 당권 도전을 준비하던 자신의 계획을 접고 개혁후보 승리에 올인하겠다는 의지도 알렸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정치고문에 위촉된 김원기 의원은 대선 기간에도 두 번의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후단협(후보단일화협의회)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현역 의원들이 잇달아 탈당해서 정몽준 후보 진영으로 넘어갔다. 더욱이 한화갑 당대표가 선대위원장을 맡지 못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버티면서 선대위 구성이 늦어졌다. 더 이상 늦추면 죽도 밥도 안 될 형편이었다. 김원기는 다시 움직였다. 수석최고위원이자 서울 출신이라 간판으로 내세우기 좋은 정대철 의원을 설득, 상임선대위원장을 수락하도록 한 것이다. 정몽준 후보와의 후보단일화 협상 역시 김원기 정치고문이 이끄는 정무팀이 주도했다. 헌정사상 최초로 무려 190만 명의 국민이 직접 참여해 선출한 국민후보를 비록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여론조사 문구와 내각참여 등에서 억지를 부리는 국민통합21을 상대로 특유의 협상력을 발휘했다.

“내 오야붕은 김대중이 아니고 김원기다. 그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내가 만난 정치인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라 김원기 계보를 하기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언급한 대로 김원기 고문은 반노와 비노 세력으로부터 노무현을 지켜낸 든든한 버팀목이자 후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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