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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바위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길

by 책꽃 BookFlower

나는 종종 ‘인간 바위’가 된다. 마음이 괴롭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모든 것을 멈추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생각은 잔뜩 얽혀 있는데 몸은 그 어떤 움직임도 거부한다. 누가 보기엔 게으름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건 무기력의 다른 이름이다. 마치 세상이 나를 향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아, 도망치듯 멈춰버린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해낸다. 마감이 있고, 책임이 있으니 집중해서 움직인다. 하지만 그 외 모든 마음먹은 일을 하려 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글을 써야지, 운동을 해야지, 정리 좀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속이 가라앉고, 모든 게 귀찮아진다. 그냥 바위처럼 가만히 있고 싶어진다. 특히 집 안에서는 그 증상이 심하다. 집을 옮겨보면 어떨까 했지만, 집이 바뀌어도 상황은 비슷했다.


갑자기 궁금했다. 나의 ‘인간 바위병’이 언제부터였을까.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였다. 화가 나면 방에 틀어박혀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단절했다. 누가 뭐라 해도, 그게 나만의 해소법이었다. 슬픔이나 분노를 밖으로 표현하는 대신, 나는 마음속에 작은 동굴을 팠다. 그 안에서 울고, 생각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스무 살이 지나 사랑을 경험하고 상처를 받을 때마다 그 동굴은 더 깊어졌다. 관계가 힘들면 나는 긴 잠수를 탔다. 휴대폰을 꺼두고, 연락을 끊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했다. 마음이 풀릴 때쯤 다시 나타나며,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었다. 결혼 후에는 그 동굴이 습관처럼 굳어졌다. 남편과 다툴 때도, 나는 싸우기보다 입을 닫았다. 말 대신 침묵으로 버티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들이 일어났다. 한순간에 모든 걸 잃게 만든 사기 사건, 그리고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일들 이후 나는 결국 ‘바위’가 되어버렸다. 눈을 떠도, 밥을 먹어도, 살아 있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활기'라는 것이 있다는 걸 느꼈다. 머리로는 ‘이겨내야 한다’고 수십 번 다짐했지만,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땐 내 몸이 있는 장소를 옮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앞 동이라 햇살이 잘 들어오고, 앞으로는 길 건너엔 작은 개울이, 뒤로는 검무산 숲이 있다. 하늘이 잘 보이는 게 좋아 늘 앞동을 고집했다.

“왜 매일 블라인드를 치면서 앞동을 고집하는 거야?”

남편이 어느 날 물었다.

“그래도 위쪽만 열면 하늘이 보여. 하늘이라도 보고 살아야 하니까.”

그게 내 대답이었다.

답답할 때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면 잠시나마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자연이 가까운 곳을 찾는다.

나를 다시 숨 쉬게 해주는 건 늘 ‘자연’이었다. 처음에는 혼자 바람을 맞고 고요한 게 좋아서 숲을 찾았다. 그런데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코끝에 닿는 흙냄새. 그 모든 것이 내 몸의 감각을 깨웠다. 숲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걸어주는 친구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숨을 쉬었다. 내 숨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십여 년 전, 뉴질랜드 남섬을 여행한 적이 있다. 대자연에 압도당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곳에는 1988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번지점프대, 높이 43미터의 ‘카와라우 번지점프대’가 있었다. 대학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나는 난간 끝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강물이 아찔할 만큼 깊었다. 영화 주인공들처럼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결국 뛰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를 느낄만큼 무서웠다. 대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정말 삶이 버거워서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다시 여기로 와서 죽는다는 마음으로 뛰어내리자.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지.”

아이러니하게도 뛰어내리러 가고 싶던 그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못 갔다. 그래도 그렇게 다시 한번 새 삶을 살자고 한 그 다짐 덕분인지,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뉴질랜드의 대자연 앞에서 인간사의 아웅다웅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돌아온 지 며칠 만에, 나는 또다시 일상에 휘말려 안달복달하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 관계 속에서 생기는 상처, 일상에서의 반복되는 좌절,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욕심들. 그 모든 것이 다시 나를 무겁게 만들었다. 혹시 나도 <월든>의 주인공처럼 자연 속으로 들어가 살면, 마음의 소란을 잠재우고 진짜 내 마음의 소리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며 세상과 거리를 두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자연은 평화롭지만, 그 안에서도 인간은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나는 요즘도 <월든>을 자주 펼쳐 읽는다. 하지만 그 책이 알려준 것처럼, 자연은 그저 평화로운 안식처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고요 속의 치열함을 배워야 한다. 자연은 ‘도망치는 곳’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는 곳’이다.


결국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누군가와의 갈등, 관계 속에서의 상처, 기대와 오해가 뒤섞인 감정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바위처럼 굳게 만든다. 하지만 자연은 그런 인간의 상처를 묵묵히 받아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숲속에 들어서면, 나무 그늘의 시원함,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까지 신비롭게 나를 반기는 듯 하다.


마음이 힘들어지면 숲길을 걷는다. 걷다 보면,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둘 정리된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간질이듯 스치면, 무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풀린다. 어느 순간, 나는 다시 인간이 된다. 살다 보면 누구나 바위가 되는 순간이 있다. 움직이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들.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견디기 위한 몸의 방어막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숲길을 걷는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아래서, 천천히 내 안의 바위를 어루만진다.

다친 마음을 치유하고,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고요한 숲길을 걷는다.

천천히 내 마음속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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