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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止觀) : 고요히 바라보다

오롯이 나를 만나는 시간

by 책꽃 BookFlower
지관(止觀) : 어지럽게 흐트러진 생각을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지혜로 세상을 비추어 보는 일


지관(止觀) : 마음을 고요히 하고 바라보라.’

내 책상 앞에 붙여둔 문장이다. 세상의 소음보다 더 큰 건 언제나 내 안의 불안이었다. 해야 할 일, 지나간 말, 다가올 일들에 대한 끝없는 잡념이 마음속에서 웅성거릴 때마다, 나는 그 문장을 바라본다. 멈추어야 비로소 볼 수 있고, 고요해야 비로소 들린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지 않게 해주는, 내 삶의 주문 같은 말이다.


30대 초반, 육아의 한가운데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엔 출산 후 정신이 없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루는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 흘러갔고, 나는 그저 수유와 잠, 울음과 기저귀 갈기에 맞춰 움직이는 기계 같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점점 ‘나’라는 존재가 흐려졌다. 아이가 돌이 될 무렵, 문득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늘 피곤했고, 내 아이를 내가 키우는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데 이상하게 답답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때 처음으로 ‘나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을 또렷이 느꼈다. 무언가 달라지지 않으면 육아우울증에 빠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를 재우고 억지로 다시 일어나려 애쓰는 대신, 일찍 같이 잠들고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세상과 아이가 잠든 그 시간에, 두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와 놀아주기로 했다.


세상보다 먼저 깨어있는 두 시간, 그건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글을 쓰거나 명상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애 엄마가 부리는 사치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게 그 시간은 도피가 아닌 회복의 시간이었다. 그 두 시간이 있어야 하루를 살아낼 힘이 생겼다. 나의 존재가 다시 깨어나고, 마음이 일어서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벽 루틴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뿌리가 되어 있다.


새벽, 아직 어둠이 완전히 물러가지 못한 그 시간.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쥔 채 조용히 나와 대화를 나눈다. 세상은 잠들어 있지만, 내 안의 시간은 천천히 깨어난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고요 속에서, 오직 내 안의 목소리만 선명해진다. 책을 읽고, 때로는 글을 쓰며, 나는 나를 다독인다. 그 시간의 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때로는 조용히 나를 이끄는 또 하나의 나였다. 이러다 다중인격이 되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두 사람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 안의 나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은 세상 속으로 돌아갈 ‘나’를 다시 세우는 시간이다.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직원도 아닌, 오직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 그 고요 속에서 마음은 잔잔해지고, 비로소 진짜 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새벽 덕분에 인생의 굴곡을 마주친 후에도 나는 조금씩 삶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뿐 아니라, 나만의 공간도 필요하다는 것. 나는 혼자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다. 혼자 있어야 할 때 열린 공간에 있으면 괜히 눈치 보고 불편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자리라도 나만의 공간, 나만의 놀이터를 만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늘 책과 문구가 가득했고, 그 속에서 나는 세상과 연결되었다. 타고난 집순이인 나에게 집은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니다. 집은 진정한 휴식이자 회복의 장소다. 어릴 적에는 늘 언니와 방을 함께 써서 혼자만의 방에 대한 로망이 컸다. 그래서 혼자 사는 집의 구조도를 그리며 상상하는 게 취미였다. 마당에 꽃을 심고, 창가에 작은 책상을 두고, 노을이 드는 방향으로 창문을 내는 집. 지금의 나는 그 어린 시절의 상상을 조금씩 현실로 옮기며 산다.


혼자만의 시간은 나를 회복시키고, 혼자만의 공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 둘이 만날 때 비로소,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다. 눈을 감고 떠올려 본다. 작지만 깔끔하고 포근한 집, 최소한의 물건으로도 불편하지 않은 삶. 벽에는 마음에 드는 미술 작품 한 점이 걸려 있고, 창가에는 잔잔한 연주곡이 흐른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이따금 미소 짓는다. 해 질 무렵 노을을 보며 천천히 달리고, 밤에는 촛불을 켜고 글을 쓴다. 그 모든 시간의 중심에는 언제나 ‘혼자 있음의 평화’가 있다.


고독을 즐긴다는 건 세상과 단절되는 일이 아니라, 나와의 연결을 깊게 하는 일이다. 고립은 벽을 세우지만, 고독은 창을 연다. 사람들 사이에서 흩어졌던 나의 생각과 감정이 고요 속에서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나를 돌보고 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가장 빛난다. 혼자 있어도 쓸쓸하지 않고, 오히려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품격 아닐까. 나의 중년과 노년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이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다.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 진짜 나를 알아가는 기쁨을 맛본다. 오랜 새벽의 시간 속에서 나는 ‘고립이 아닌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책 한 권이, 때로는 글 한 줄이 나의 친구이자 거울이 되어준다. 좁고 얕은 인간관계 속에서도, 책과 글로 이어진 느슨한 연대는 나를 세상과 다시 연결시켜 준다. 독서모임에서 나눈 한 문장, 글쓰기 모임에서 들은 누군가의 고백이 내 안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서로에게 스승이자 동반자가 되고, 작은 불빛이 되어 서로의 길을 비춘다.


나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며, 내 안의 목소리가 나의 스승이다. 고요한 시간 속에서 자라나는 이 생의 리듬이, 내 삶의 음악처럼 느껴진다. 혼자 있는 시간과 나만의 공간은 나를 세상에서 격리시키는 섬이 아니라, 다시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쉼표다. 나는 그 안에서 고립이 아닌 고독을 즐기는 ‘명랑한 은둔자’로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의 나를 가장 평화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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