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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변 Dec 07. 2020

너의 이름은 현실

<너의 이름은> 삼천포 리뷰




스스로 목석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소설이나 영화 등의 주인공, 혹은 연예인 등 감정이입을 위해 조립된 사람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느낀다. 연예인에는 애초에 관심이 전무하고, 즐기는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도 푹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굳이 굳이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고 평가하려는 못된 습성이 있다.





아마도 나는, 내게 어디서 왔는지 모를 모래주머니를 지우고 있나 보다. 가상의 인물에게 푹 빠진 나머지 모래주머니 따위 까맣게 잊어버리고 주저앉아 울고 있는 초등학생 같은 나를 발견하면 심장이 덜컹, 하고 무너질까봐 그런 것 같다. 언젠가 생전 처음 보는 미용실의 아주머니가 내게 "힘 좀 빼고 살아도 되겠는데?" 라고 한 적도 있다. 골프 안 쳐보신 티 내시네. 힘 빼는 게 제일 어렵다구요. ㅠ








아직까지 힘을 빼지 못하고 있는 나라서, 그래서인지 감동 자체가 목표인 소설이나 영화 등은 어쩐지 손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이따금씩은, 정신을 잃고 두 손을 모아 몰입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감동적인 수작이라는 평이 자자해서 미뤄놓고 있던 <너의 이름은>이 바로 그랬다. 주인공들의 운명이 맞닿기를, 돌아보기를, 서로 알아보기를 아주 오랜만에 나를 내려놓고 응원했다. 그리고 낯선 감동과 안도, 그리고 낯익은 부끄러움을 차례대로 받아들였다. 참 간만의 일탈이었다.






비슷한 경험이 다른 소설에서도 있었다. (책을 많이 읽지만 이런 경험은 정말 드물다) Golden Compass라는 외국 아동 판타지 소설인데, 소년, 소녀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차원을 갈라서 각자 다른 차원으로 영원히 이별하는 선택을 하는 결말에서 핑그레 눈물이 돌았다. 나도 내 반응이 살짝 놀라서, 내심 '아, 원서로 읽으니까 감동적이네;;;' 하고 괜시리 파리 한 마리 없는 무고한 천장을 응시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유독 다른 차원, 다른 세계 간의 이별은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것이다. (나만 그런가요?) 영원하고 완전무결한 이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상실감. '확실히' 살아 있으면서도 '절대적으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 가혹한 것 아닐까.






사실 공상과학, 신사, 혜성, 통째로 날아간 마을, 머리띠 같은 장치들은,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슬픈 현실을 미화하려는 얕은 수작일지도 모른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간 셀 수도 없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한두 번 마주쳐 손을 잡고 반가워하다가도, 서로의 소식을 어느새 멀어진 발치에서 신기해하고, 한두번쯤 머뭇거리다가, 잊고 살아가다, 어쨌거나 둘 중 하나는 먼저 가기 마련이므로 허망한 부고 한 장을 딸랑, 받아들 것이다.


마치,

 

타키와 미츠하의 방울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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