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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변 Jan 30. 2023

블루칼라 변호사

어떤 변호사로 포지셔닝할 것인가?

변호사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일하는 직업은 드물 듯 하다. 시장에서 경쟁하는 변호사들도 각자 자신만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개업을 준비하면서 나는 선배 변호사들이 어떻게 시장에서 자리잡고 있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개업 5~6년차 쯤 되는 선배 변호사(이하 '선배')와 당산역에서 만났다. 석쇠쭈꾸미가 맛있는 집에서 먹고 마셨다. 맥주와 소주를 한 병씩 시켰다 이내 소주병만 늘어 갔다. 역시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전개다.

당산역의 맹주.


선배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개업하면 잘 할 거라고 했다. 왜그러냐, 했더니 '변호사 같지 않아서' 좋댄다. '블루칼라 같다'나.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하길래 웃어넘기기만 했었다. 그런데 남자가 가장 솔직해진다는 소주1병 맥주1병이 들어간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길래, 허리가 절로 꼿꼿해졌다. 변호사가 왜 변호사 같으면 안될까. 그 내막이 궁금했다. 참고로 이 선배도 변호사같이 안 생기긴 했다.


변호사 같은 변호사들은 너무 많다.
걔네들 사이에서 '더 변호사스러움'으로 승부하면 한도 끝도 없다.
서울대 나왔다고 광고? 변호사는 반이 서울대다.
'그놈이 알고보니 서울대더라'가 얼마나 강력할지 생각해 봐라.


꽤 큰 충격이었다. 내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서울대학교 정치학전공 졸업,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이라는 훈장 두 개가 이름 석자 바로 아래 걸려 있었다. 소주 탓인지 얼굴이 따뜻해졌다. 선배가 담배를 피러 나간 사이 얼른 훈장을 떼어 버렸다.




세스 고딘, <마케팅이다>. 강력추천.


마침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세스 고딘이라는 마케팅 전문가의 <마케팅이다> 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골자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마케팅의 시대는 갔고, 이제 '최소유효시장'을 공략하라는 것이다. 최소유효시장이란 '내가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고 구체화된 집단'. 즉 다수의 사람들에게 미약한 지지를 받기보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게끔 마케팅하라고 조언한다. 거기에서부터 세를 늘려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선배와 세스 고딘의 이야기는 서로 주파수가 겹쳐 많은 울림이 있었다. 변호사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많은 고객이 필요하지는 않다. 내 진심과 실력을 알아 주는 끊임없이 분쟁에 시달리는 소수의 사람들만 있어도 변호사는 충분히 자신과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이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서울대 나온 변호사인지를 더 많은 사람에게 퍼뜨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던 거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나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믿을 만한 놈인지를 보여주는 게 먼저인 건데. '딱 봐도 서울대 나온 변호사'보다 '알고보니 서울대였더라'가 100배는 강력한 건데.




앞으로 내가 어떤 변호사를 표방하고, 어떤 컨셉의 사무실을 운영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 뭘 하고 있든, 오늘 이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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