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소송
소송이 많은 사회는 좋은 사회일까? 보통 소송은 이런 단어들과 연결된다. 갈등, 다툼, 멱살잡이, 돈 등등. 그래서 소송이 많은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근데, 내가 변호사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쉽게 소송할 수 있는 나라, 소송의 리스크가 적은 나라, 그래서 소송이 많은 나라가 좋은 나라다. 소송을 망설이는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소송이 아무리 비싸고 어려워도 삼성전자는 소송을 한다. 소송이 쉬워질수록 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법원의 문을 두드린다.
약한 사람들은 돈도 돈이지만 '시간'에 취약하다. 시간이 가져다 주는 스트레스에 약하다. 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없어 쉽게 포기해 버린다. 소송이 길어질수록 약한 사람들은 소송을 못 하게 된다. 소송이 오래 걸리는 나라에서, 약한 사람들을 만나는 변호사는 적극적으로 소송하자고 꼬실 수 없게 된다.
통념과 달리, 변호사들이 항상 강한 사람들 편은 결코 아니다. 변호사는 돈을 주는 사람 편이다. 약한 사람들 대신, 강한 사람들에게 소송을 제기해서 돈을 받아낼 수 있다면 약한 사람들 편에 설 변호사들은 (나를 포함해) 한 트럭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법은 약한 사람들에게 점점 안 좋은 환경으로 가고 있다. 재판이 오래 걸리고 있다. 해도 해도 너무 오래 걸리고 있다.
재판의 실패, 어떻게 할 것인가 (lawtimes.co.kr)
내 독자적인 주장도 아니다. 오늘자 법률신문에 이형근 판사님은 '재판의 실패'를 선언하셨다. 점점 늦어져가는 법원의 일처리, 어려운 사건들이 뒤로 밀리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조에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사이다'를 한 통 들이킨 기분이었을 거다. 포털에 '소송지연'만 검색해도 성토의 목소리가 흘러넘친다.
내가 수행하고 있는, 꽤나 간단한 가맹사업법 관련 사건은 소장 접수 후 1년 반을 넘게 끌고 있다. 한 번 변론종결('이제 양측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으니 판결문을 쓰겠다')되었다가 변론재개되었다. 오늘은 재개 후 2번째 변론기일이었다. 오늘만큼은 변론종결 해주겠지, 3월에는 판결문 받아볼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청천벽력 같은 조정회부결정문('너네 대화로 한 번 풀어 보고 와')이 출근한 나를 반겼다. 월급 받는 변호사야 출장이 없어졌으니 아닌 말로 기분이 째질 법 하다. 그런데도 판결문만 기다리고 있는 의뢰인들이 불쌍해서 짜증과 무기력감이 솟구쳤다.
대화로 해결이 안 돼서 1년 반을 끌어 온 사건인데 이제 와서 조정회부라니. 2월 말엔 판사님들의 인사이동 시즌이다. 이제 3월에 새로 오시는 판사님은 조정 불성립 후 법정에 돌아온 우리 사건, 두꺼워질 대로 두꺼워진 기록을 침침한 눈으로 마주하실 거다. 화가 나신 의뢰인이 걸어 온 전화에 나는 망연히 수화기를 들고만 있었다. 9급 공무원도 그렇게는 일 안한다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냐며 분을 삭혔다.
심정에 공감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풀죽은 내 목소리가 미안했는지, 그래도 변호사님 고생하셨다며 전화를 끊는 의뢰인의 목소리에 난 더 서글펐다.
변호사와 법원은 서로 상부상조해야 한다. 변호사가 없으면 사건이 없고, 사건이 없는 곳에 법원이 설 자리는 없다. 변호사는 권리를 침해받은 국민들에게, 소송하는 것이 권리를 지킬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법원은 빠르고 상식에 부합하는 판결로, '그래도 법원은 믿을 만 하다' 라는 인식을 심어 줘야 한다. 그래야 변호사들이 자신감 있게 소송을 추천할 수 있다. 변호사들은 점점 그 자신감을 잃고 있다.
2022년 전국 민사 법원에 소장을 접수하고, 첫 변론기일이 잡힐 때까지 평균적으로 4.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소장을 작성하는 데까지 1개월 정도 걸린다. 1개월 정도 변호사와 열심히 으쌰으쌰해서 법원에 읍소하는 소장을 올려도, 1회 변론기일이 지정되기까지 평균 5달이 걸린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아무리 간단한 사건이라도 판결문을 받아보기까지 1년 안에 마무리된다고 섵불리 이야기할 수 없다. 이런 사정에서, 낯짝이 두껍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변호사도 소송하셔야 한다고 꼬시기 어렵다.
의뢰인들은 언제 결과 나오느냐, 이길 가능성은 얼마나 되냐를 묻는다.
이길지 어떨지는 해봐야 압니다만,
1년 안엔 판사님이 쓰신 판결문 받아볼 수 있습니다
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회, 그 사회가 좋은 사회다.
난 소송 잘 권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