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학원 이야기
엄마는 나에게 학교 외에 어디를 더 다녀야 한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5학년(1990년)이 된 봄의 어느 날 나를 동네 주산 학원에 등록시켰다. 태어나 처음 가게 된 학원이라는 곳이 마냥 신기했다. 길쭉한 주판이 삐죽하게 삐져나온 주산학원 가방을 하나 더 들고 학교에 가는 것도 왠지 친구들 앞에 자랑스럽고 좋았다. 게다가 주산학원에 간 지 한 달도 안 된 나에게 주산학원 선생님은 이렇게 진도가 빨리 나가는 애는 없었다, 너무 머리가 좋다는 등의 칭찬을 퍼부어주셨는데~ 그것이 정말인 줄 철석같이 믿은 나는 그 칭찬이 좋아서 주산 학원에 가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산학원을 다닌 지 나는 한 달도 채 안되어 자격증을 하나 땄다. 그 학원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자격증을 딴 어린이라고 했다(요즘 같으면 아마 학원 앞에 현수막 같은 걸 걸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역시 우리 딸이라며 좋아했다.
그때는 자격증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를 때였는데, 빳빳한 종이에 자격증의 이름과 내 이름, 주민등록 번호가 찍혀 있었다. 특히나 맨 아래 찍힌 '대한상공회의소'라는 발행기관의 이름과 직인은 내가 마치 장원급제라도 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장원 급제는 안 해봤지만....). 그런 자격증을 처음 받아봐서.
이내 고비가 찾아왔다. 주산 다음으로 배운다는 이름도 생소했던 '부기'. 그 당시 '부기'라는 과목은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배우는 거라고 했다. 초등 5학년 밖에 안 된 아이지만 나름 주산 영재(?)니까 부기를 해도 잘할 거라고 했다. 부기는 요즘으로 말하면 '회계학' 같은 것인데 회계의 실무에 가까운 분야이다. 상고생도 아니고 초등 5학년생이 부기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기도 했고 사실 너무 재미가 없었다. 부기를 시작한 나는 슬슬 주산 학원에 가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주산학원에 가기 싫다고, 끊고 싶다고. 엄마는 뭐 하나 시작하면 끝까지 해보자 주의가 강한 사람이라 쉽게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조르는 날이 시작되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나는 주산학원을 10개월 만에 끊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10개월은 정말 짧은 기간이지만, 고작 열두 살, 초등 5학년생이었던 나에게 주산학원 10개월이 남긴 것은.....
선생님은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학원이라는 곳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나를 너무나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해주는 선생님이 좋았다. 칭찬은 그런 것이다. 내용의 진위를 떠나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그렇다고 너무 사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입 발린 칭찬은 황당할 수 있으니 조심) 그 선생님의 칭찬 덕분으로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어느 날엔가는 학교 담벼락에 핀 장미꽃을 꺾어다 선생님 책상에 꽂아두기도 했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나오는 제제가 세실리아빠임 선생님의 책상에 꽃을 꽂아두 듯이 말이다.
그놈의 '부기'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주산학원을 더 오래오래 다녔을지도 모른다. '부기'라는 큰 산에 부딪혀서 주산학원 선생님과의 인연도 그렇게 10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지금도 나에게 남은 주산학원의 기억은 아련하고 애틋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