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와이프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뜬금없이 와이프가 나에게 근무 일정을 묻는다.
매번 근무 일정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귀찮기에 근무표를 출력해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있다.
그러나 와이프에겐 어림없다. 근무표를 눈앞에 두고도 나에게 직접 물어본다. 그럼 나는 근무표가 있는 곳으로 직접 가서 확인 후 대답해 준다.
이런 걸 전문 용어로 똥개 훈련이라 부르는듯하다.
그런데 와이프는 왜 나에게 4월 중순 근무 일정을 물어본 것일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 나 빼고 놀러 가려고 하나, 아니면 중요한 심부름이라도 시키려고 하나. 일단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해봐야겠다. 심부름을 시키려 하는 것이라면 피해 가야 하기 때문에.
"4월 중순? 글쎄 음.. 근무랑 쉬는 날이랑 섞여 있네. 그런데 쉬는 날에 대체 근무 잡힐 것 같기도 하고.. 영 가늠하기가 어렵네.."
와이프의 표정이 평온해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휴우.. 다행이다! 나 4월 중순에 회사 연수 있는데 여보 쉬는 날이면 아쉬울 뻔했네. 여보 쉬는 날에 같이 놀아야 하는데 나는 교육이면 여보 심심하잖아!"
"그.. 그치? 다행이네"
입으로는 맞장구치고 있지만 머릿속은 디스코팡팡마냥 빠르게 회전을 시작한다.
내가 지금 무엇을 들은 거지.
연수....
몇 년 전 와이프가 천안으로 일주일간 연수를 다녀온 기억이 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내린 채 풀 죽은 목소리로 와이프에게 이야기한다.
"뭐야.. 그럼 나 또 혼자 있어야 돼? 회사도 진짜 웃긴다. 결혼 한 사람을 며칠씩이나 교육하면 어떡해?"
과하게 걱정하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
그러나 상관없다.
내 와이프는 4월 중순 연수를 간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손가락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곧이어 온몸도 들썩들썩 거리기 시작한다.
와이프가 내일이면 3일 동안 교육을 간다. 와이프의 교육 일정에 맞춰 나도 연차를 하나 박아놨다.
낮에는 집에서 푹 쉬고 저녁에는 간만에 친구들과 술도 한잔할 계획이다. 오랜만에 적정 주량을 살짝 초과한 음주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으. 벌써부터 취하는 기분이군.
그런데 천방지축 알 수 없는 와이프가 조금 철이 든 듯하다.
평소 같았으면 2박 3일 동안 어디론가 떠나면 일주일 전부터 캐리어 2개에 짐을 꽉꽉 채워 담았을 와이프인데 웬일인지 여유롭다.
"여보 미니멀라이프로 생각을 바꾼 거야? 내일 교육인데 짐도 안 챙기고 여유롭네?"
와이프가 새침하게 대답한다.
다음날 아침.
와이프가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화장에 더 힘을 주는 듯하다. 구석에 처박혀있던 에어랩까지 꺼내든다.
풀 메이크업을 완성한 와이프가 나에게 말을 건다.
"여보 나 오늘 어때? 꾸안꾸처럼 보여?"
할 말이 많지만 오늘도 역시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침묵은 늘 가정을 평화롭게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와이프가 노트북으로 줌을 켠다. 그러고는 노트북을 들더니 집안 곳곳을 돌아다닌다. 얘 뭐 수맥이라도 찾으러 다니는 건가.
이내 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 자리 조명이 제일 괜찮군."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다과를 세팅하고,
색연필 등의 필기구도 갖다 놓는다.
와이프가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뭐 빼먹은 것이라도 있는 건가.
아. 설마.
뽀뽀?
훗.
"출근한다더니 출근 안 해?"
와이프가 아픈 내 상처에 굵은소금을 마구마구 뿌려댄다. 썩을 내 연차. 똥꾸멍에서부터 억울함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언제까지 불평불만을 할 수는 없는 법.
이 상황에 적응하자.
"응, 여보 재택 교육받을 때 외조 좀 하려구 연차 냈어. 잘했지?
와이프가 감동을 받았는지 표정이 근엄해진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화면에 나오지 말고 방 안에서 입 닫고 얌전히 있어."
그렇게 며칠간의 슬기로운 깜빵생활 아니, 재택 교육이 끝이 났다.
와이프는 숨기고 싶었겠지만 방 안에 감금되어 있으며 나는 다 들었다.
와이프는 늘 본인의 발표 순서가 올 때마다 바들바들 개 떨듯이 떨었고, 매일 아침 본인에게 질문이 들어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어렸을 때 웅변대회는 어떻게 나갔던 건지.
와이프의 재택 기간 동안 나의 직업도 바뀌었다.
취사병으로.
유일하게 방 밖으로 석방될 수 있었던 시간.
점심시간.
재택 교육이지만 본인의 일에 집중하며 열정을 다하는 와이프를 보니 존경스럽기도 했다. 나 같았으면 텀블러에 막걸리 담아서 마셨을 것 같은데.
재택 교육의 마지막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간단하게 회식을 한다. 드디어 나도 자유다.
파전에 막걸리를 한 잔 기울이는데 와이프가 3일간 재택근무를 하며 느낀 점을 이야기해 준다.
이번에도 뭐 돌려깎기 그런 거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조금 걱정이 되지만 일단 들어본다.
"나 근데 참 오밀조밀하게 생긴 것 같아."
드디어 본인이 예쁜 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그래.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잖아.
너 오목조목 예쁘게 생겼다고.
.
.
.
시박꺼. 그럼 그렇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사드 배치도 아니고 뭘 또 재배치하냐 무섭게.
정말이지, 와이프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