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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우 Dec 24. 2024

까똑, 명퇴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자동차 타이어를 갈아 끼웠다_retire

크리스마스이브, 남들은 오전 근무를 바쁘게 시작할 때 나는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겨울 햇살을 즐기며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까똑,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의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이 떴다. 


제목: 인사발령사항(명예퇴직 및 특별승진)

대변인실 홍보담당관 지방서기관 허필우

지방공무원법 제39조의3제1항제4호 규정에 의하여 지방부이사관에 임함

지방공무원법 제66조의2의 규정에 의하여 그 직을 면함


'그 직을 면한다'는 말은 퇴직을 말한다. 정년보다 2년 먼저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에게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단톡방 직원들은 '과장님이 시청을 떠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원하는 것을 이뤄냈으니 축하한다.'면서 꽃다발 이모티콘을 날렸다. 


퇴직이 현실이 되었다. 나도 막상 공문을 받아보니 실감이 났다. 새로운 날에 대한 기대와 함께 한편으로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갑자기 닥쳤기 때문이다.


D-400일이 D-40일이 된 날


시청을 떠날 날이 일 년 하고도 한 달 조금 넘게 남은 날이었다. 시청 근무를 마치면 공로연수가 일 년 진행될 예정이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홍보담당관실을 떠나서 조금 편한 사업소에서 근무하게 되면 퇴직 준비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사부서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에 발신자 이름이 떴다. 인사 관련 일이겠거니, 짐작했다. 그는 일주일 전에 인재개발원 전임교수 모집 공고가 났으니 한번 응모를 해 보라고 권했다. 얼떨결에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공고문을 차근차근 읽어보니 평소 내가 해왔던 업무였다. 신규자 과정에서 공무원 업무 실무를 강의하고 중견 직원 과정에서 두 과목 정도 강의하면서 분임 과제를 지도하는 업무다. 나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고 책도 펴냈다. 이에 더하여 대학교에서 겸임교수를 한 적도 있고 현재도 가끔 강연을 하고 있다. 나는 후배를 가르치는 일이 좋기도 하고 보람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남지 않은 마감기한을 맞추기 위해 증명서를 발급받고 자기소개서와 직무 계획서도 작성해서 제출했다.


1차 합격자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려 13명이 면접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자신감은 급속하게 추락했다. 13대 1의 경쟁률을 뚫을 수 있을까? 그래도 원서까지 제출했으니 준비는 해보자, 고 마음먹었다. 일주일 휴가를 내고 도서관에 박혔다. 내가 강의할 과목의 요점을 정리하고 예상질문 답변서까지 만들었다.


면접위원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인터넷상에서 공무원 면접 질문을 미리 알아보고 준비를 철저하게 한 덕분에 답변을 할 수 있었다. 면접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진행되었다. 삶의 좌우명, 갈등관리 사례와 교훈, 강의와 관련된 최신 트렌드와 적용예시 등에 대하여 16분 정도 질의와 답변이 오고 갔다. 나는 막힘이 없이 답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면접위원들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 결과를 기다려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면접장을 나왔다.


면접 준비를 하는 동안 최근에 느끼지 못한 특별한 감정이 나를 흔들었다.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평가를 받는 게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사회적으로 약자가 되었다. 퇴직 후 일자리 전쟁에 뛰어들게 되면 자주 겪어야 할 현실이고 감정이다. 간절함을 먼저 보여야 하나? 자신감을 표현하는 게 더 좋을까? 나는 둘 사이에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다. 


지난주 금요일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시 홈페이지에서 나의 응시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조마조마하는 마음에서 해방되었다. 합격! 퇴직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불과 사흘 만에 퇴직 처리가 되었다. 30여 년 공무원 생활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되는 게 당혹스럽다. 그동안 함께 했던 동료와 후배 직원에게 인사도 하고 친한 사람들과는 식사자리도 마련해야 하는 데 쫓기듯 짐을 싸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타이어를 갈아 끼웠다


오늘 오후에 일부러 집을 나섰다. 약속도 잡혀 있거니와 아내와 하루종일 집에 있는 것도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눈치 주지 않으려는 눈치가 보였다.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이어를 갈아 끼웠다. 지난여름에 엔진오일을 교체하면서 카센터 주인이 '타이어 바꿔야 될 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미루고 있었다.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집과 인재개발원의 거리가 왕복 50km다. 수정산 터널과 백양산 터널을 거쳐 강변도로를 50분 정도 달려야 한다. 3년간 출퇴근을 해야 하니 자동차 타이어를 점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임 교수가 되면 임기제 5급 공무원 신분이 된다. 연봉도 (아주) 많이 삭감되어 새 차를 살 수도 없다. 


퇴직하는 심정은 어떤가요? 낮에 만났던 사람의 질문이었다. 사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주위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고 축하를 해주고 있으니 그 마음을 고맙게 받는 일이 우선이다. 생활의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천천히 생각해 볼 작정이다.


30년의 시간을 며칠 만에 정리할 수는 없다. 무리다. 퇴직 공문을 받은 날 나는 타이어를 갈아 끼운 것으로 충분히 할 일을 했다. '타이어뱅크'에서 나는 re-타이어 대신 new 타이어를 장착했다.


아직 D-372

(임기제 공무원을 다시 시작하면 D데이를 다시 리셋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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