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65일'이었는데 'D데이'가 되어버렸다
아침 8시에 중대본 회의가 잡혔다. 전날 퇴근 무렵, 서무는 '부시장 주재 회의이기 때문에 과장이 참석해야 된다.'고 알려주었다. 2024.12.31. 자로 명예퇴직되었다(?),는 공문을 받고 나서, 마지막 날은 그냥 제낄까, 하고 생각했었다. 나는 오히려 아침 일찍 출근당했다.
출근 준비를 서둘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쫓기듯이 운전했다. 마지막 날이라서 생각이 많아지게 되니 손발이 더디게 움직였던 탓이리라. 회의 시작 5분 전에 도착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거운 분위기에서 엄숙하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10시에는 A방송사에서 시장님 신년사를 녹화했다. 7층 의전실에서 5분 안에 끝났다. 방송사 카메라가 철수되기도 전에, 나와 담당자는 다른 방송국을 향해 서둘러 출발했다. B방송국에서 기획한 신년 대담 프로그램 녹화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지하 1층, 담당자의 운전 미숙으로 주차장에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굼벵이 뒷걸음치듯 후진해서 나오면 저만치 다른 차가 얼른 가겠다고 밀고 들어와서 다시 원래 자리로 들어갔다. 두 세번 반복되었다. 직원을 강하게 키워야 하나, 아니면 내가 운전석으로 자리를 바꿔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담당자의 불안한 마음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자리를 바꿨다. 몇 번 가봤던 방송국이라서 우리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무사히 녹화방송을 마치고 나니 12시였다. 나는 서면에 있는 밀면집 '춘하추동'이 떠올랐다. 여기는 비빔면을 시키면 미리 비벼서 나온다. 추가로 만두를 한 접시 시켰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근처에서 커피까지 마셨다. 담당자는 내게 퇴직 소감이 어떤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게 있는지 물었다. 조그만 커피숍에 손님이 꽉 찼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연말스럽다.
오전은 정신없이 보냈지만, 오후는 여유가 있었다. 미처 퇴직 인사를 하지 못한 간부와 직원을 찾아가서 작별을 고했다.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이 몰려와서 허전한 시간을 메우기도 했다. 몇몇 직원은 전화로 내게 위로와 축하를 전했다.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30년의 세월을 보낸 직장을 떠난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모든 짐을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퇴직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사무실을 나섰다. 6시까지 채우면 직원들이 '과장이 미련이 남아 사무실을 못 떠나는 구나',하고 생각할 것 같았다.
나는 서른부터 육십까지 삼십 년의 세월을 한 직장에 근무했다. 많은 업무를 처리했고 인간관계를 맺었지만, 직장을 떠나기 전에 연락해야 할 사람을 적어 둔 메모장을 보니 몇 명 되지 않았다. 사실은 연락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조용히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먼저 전화해서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하면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저기 전화 돌려 '나 나가요, 잘 있어요.'하는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퇴직을 하고 보니, 다시는 채울 수 없는 시간의 무게가 나를 가라앉힌다. 내 삶의 남은 시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편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거 좀 해보자.'라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게는 못 미치겠지만 세상의 기준보다는 나의 기준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고 저질러 보겠다. 나를 묶은 족쇄를 풀고 수면 위로 떠올라 새로운 세계를 만나보자. 이런 생각을 하니, 퇴직으로 생긴 우울한 감정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나의 휴대전화기에 설정한 'D데이' 기능에 따르면 2024.12.31. 일은 'D-365'일이다. 나는 앱에 들어가서 수정을 했다. 이날 명퇴를 했으니 12월 31일을 'D데이'로 맞췄다. 오늘(2025.1.1.)부터 퇴직 후 1일, 즉 'D+1'이 되었다.
퇴직하니 소감이 어떠냐고? 직장에서 쫓겨난 섭섭함과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는 설렘이 정확하게 50대 50 비율로 공존한다. 내일부터 섭섭함을 아주 조금씩 설렘으로 바꾸어 나가겠다.
퇴직 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