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 하나도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호텔 입구에서 느낀, 기분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프런트라고 할 수도 없는 자그만 방에서 안내인은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굳이 방까지 안내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가지며 4층에 내렸다.
"신발을 벗어 여기에 넣어두고 복도로 들어가십시오."
이게 뭔 시스템이지?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신발장이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고 생각하며 호텔방문을 연 순간 아차, 싶었다. 여긴 호텔 방이 아니라 수용소 같았다.
일인용 침대 두 개를 나란히 편 상태에서 한 개를 없앤 면적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전부였다. 발끝에 별도로 침대 한 개 정도의 욕실이 있었다. 세면대 위에 샤워기가 달렸고 한쪽 끝에는 변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삼 일 동안 잠을 잘 곳은 일인용 침대 세 개 공간이 전부였다.
어디서나 희망은 있는 법, 나는 창문을 발견했다. 예약을 할 때 봤던 창문 사진이다. 일박에 십만 원 초반대 가격에 창문이 달렸으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기쁜 마음으로 창문을 열였다. 헉, 팔을 뻗기도 전에 빨간 벽돌이 내 손을 막았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간 유대인들이 샤워를 시켜 준다길래 그동안 몸에 쌓인 체취와 땀을 씻겠다는 기대를 안고 방에 들어갔지만 샤워기에서 가스가 뿜어져 나왔을 때 느꼈을 절망감을 아주 잠시 떠올렸다.
지도를 보고 호텔을 찾아오면서 나는 (쾌적할 거라고 예상한) 룸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가벼운 샐러드로 저녁 식사를 하고 샌드위치로 다음날 아침을 때우기로 하고 파리바게트에서 음식을 골랐다. 나의 기분 좋은 상상은 방의 컨디션을 확인하고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래도 뭘 먹기를 해야 해서 좁다란 1인용 침대 위에서 샐러드를 먼저 먹었다. 이렇게 조그만 방에 냉장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잠시 시간을 두고 다음날 아침 먹으려고 했던 샌드위치마저 해치워야 했다.
한국생산성 본부에서 진행하는 사내강사 과정을 듣기 위해 심사숙고해서 고른 호텔을 바라보면 나의 대학시절 어느 숙소가 떠올랐다.
20대 초반,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기도 미안한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팔을 완전하게 펴고 눕지도 못하게 좁았다. 하루 종일 햇빛도 들지 않아 나의 젊음만큼 어두웠다. 그 비좁은 곳에 친구가 한 명 찾아왔다. 그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연쇄점에 가서 나의 학생증을 맡기며 빵을 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찾아와서 나를 끌고 나가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곳에서 시든 삶을 계속 살았을 것이다.
20대의 나의 숙소에 비하면 얼마나 호화스러운가를 생각하면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 상황에서 웃는 내가 우스워서 다시 한번 웃었다. 혼자 청승스럽게 인상 찌그리고 있는 것보다 백배 좋은 일이다.
에어컨과 샤워기는 제대로 작동되었다. 한국생산성본부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웃 블로그를 눈팅했다. 우연히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리뷰한 글을 읽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세 번 읽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저자가 아유슈비츠에서 보낸 3년간을 기록한 글이다. 저자는 이 경험을 토대로 나중에 '로고테라피'라는 심리학 치료를 창시하였다. 저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아내라'다. 저자도 이 과정을 통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둘째,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련, 즉 서울에서 삼일 동안 머물 숙소에 대하여 나는 나의 과거를 회상하고 빅터 프랭클의 저서를 되새기면서 심플한 밤 시간을 즐기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나는 숙소에 들어와서 씻고 TV를 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푸라기 하나도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