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연필로 쓰기>
아들은 종이가방 세 개를 가득 채웠습니다. 옷가지와 노트북, 참치와 컵라면, 손이 모자랐지만 선풍기까지 챙겼습니다. 옮겨 줄까? 아니 혼자 들고 갈 수 있어. 아내가 아파트 문을 열어주자 그대로 쏙 빠져나갔습니다. 지난주,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스물 아홉 살 자식이 품을 떠났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부모의 품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카시아 나무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 한 대 구경하기 힘든 신작로 옆 아카시아 잎은 우리에게 소중한 놀이거리였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잎을 떼내다보면 금방 집 앞에 도착합니다.
그날 아침, 소년은 가방 하나를 품에 안고 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에 실려 읍으로 향했습니다. 가족과 헤어지는 슬픔보다는 동무들과 이별하는 아쉬움으로 아카시아 나무를 지났습니다. 그때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집을 찾았습니다. 대문 앞에서 어머니가 저를 보고 손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볼을 스치는 아카시아 나뭇잎이 눈에 박혔습니다. 제 나이 열한 살 때였습니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짓지 말고 마산에서 공부하라고 저를 일찍 내보냈습니다. 소년은 더 큰 도시로 나오기까지 큰 댁에서, 고모 댁에서, 때로는 친구 집에서 기식하였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청년이 된 자식이 제발로 집을 떠난다고 하니 옛기억과 함께 새로운 마음이 솟아납니다.
집 떠나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 줄까요?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한들 귀에 들어오기나 할까요? 밥 잘 먹고 다니라는 이야기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밥 먹고 다니려면 밥벌이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김훈 작가는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내의 한 생애는 '일언폐지해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나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쓰라. 난 나대로 벌겠다.“(<라면을 끓이며> 중)
밥벌이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김훈 작가의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나는 나의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에 당당하려 한다. 나의 이야기가 헐겁고 어수선해도 무방하다.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 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히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이 책은 일산 신도시에서 20년을 살아온 70대 소설가의 편견과 소망, 슬픔을 연필로 쓴 글입니다. 저자는 신도시 공원에서, 팽목항에서, 휴전선에서, 울진에서, 연평도에서 마주한 삶들에 대해 썼습니다. 칠곡군 할매들의 시집과 남북정상회담, 화살머리 고지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추정되는 병사의 수통, 남북철도 공동조사단의 출발을 보며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구체화시켰습니다.
인생 70에 이른 작가의 발걸음과 생각을 따라 넘기는 책장은 무겁고도 넉넉합니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가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저는 김훈 작가의 팬입니다. '들리지 않는 적막'을 말로 옮긴 <현의 노래>, 풍경과 사물로부터 문장을 얻었다는 <내 젊은 날의 숲>,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화장>이 포함된 <강산무진>, 삼전도의 굴욕을 팩션(팩트+픽션) 형식으로 쓴 <남한산성>, 그리고 수필집 <자전거 여행 1,2>와 <라면을 끓이며>, 이 모든 책이 작가의 깊은 사유와 굳건한 문체로 표현된 수작임에도, 저는 <칼의 노래>의 감동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느낌의 강도와는 상관없이, 1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띄엄띄엄 그의 작품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읽기를 잘했다고 느꼈습니다. 작가의 좋은 문장을 베꼈습니다.
이번에 읽은 그의 글 중에서 '여름 점심때 잘 익은 오이지를 반찬으로 해서 찬밥을 먹으면 입안은 청량하고 더위는 가볍다.'는 글을 대하면서, 여름에 제가 가장 먹고 싶어 하는 오이냉국에 대한 느낌을 적어 보고 싶었고, '공차기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수영의 유익과 즐거움'을 쏟아보고 싶은 욕심이 일었습니다.
제가 부러워하면서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것은 김훈 작가의 문장입니다. 그의 문장은 아산 현충사에서의 침묵에서, 바다와 가야금을 향한 응시에서, 산하를 밟고 다닌 그의 무거운 발길에서, 자전거 바퀴에서 그리고 매일 책상을 하얗게 덮는 지우개 똥에서 나왔기에 더욱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김훈 작가는 여러 글에서 '밥벌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도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라고 썼습니다. 오늘의 밥벌이가 내일의 밥벌이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은 참혹하지만 아직 제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았으니 희망을 가져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