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뒤안길에서 클래식을 듣겠다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

by 필우

부산에서 운전을 해 본 사람이라면 독특한 운전 문화에 매료(?) 되었거나 식겁했을 것입니다. 규정속도를 지키고 있는 제게 쏘아대는 상향등, 숏트랙 선수도 아닌데 신호가 바뀌자마자 반응시간이 느리다고 빵빵 울리는 경적, 그렇게 바쁘면 어제 출발하지, 이럴 때면 저는 클래식 음악에 더욱 집중합니다. 운전 중에 저는 항상 클래식을 듣습니다. 클래식의 부드러운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솟구치려는 화(火)도 말랑해집니다. 그래 먼저 가라, 다 이유가 있겠지.


퇴직 이후 기대되는 나의 클래식 음악 생활


퇴직 후 삶을 이미지로 가끔 그려봅니다. 두 개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시나리오 A는 직장 다닐 때 준비한 자격과 커리어로 새로운 직장에 다니거나 직접 컨설팅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시나리오 B는 그저 그런 퇴직자가 되어 빈둥거리는 것입니다. 월세를 감당할 수 있다면 오피스텔에서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나리오 A든, B든 확실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간이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군데군데 뻥 뚫린 시간으로 저는 '영화의 전당'에 죽치고 앉았거나 공원 벤치에서 비둘기 구경이나 하고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볼 수 있는 힘', 즉 시력이 좋지 않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날 소진해버린 저의 시력은 1시간 이상 책을 보거나 모니터, 액정화면을 볼 수 있게 저를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적당히 볼걸.


남는 시간과 모자란 시력에 알맞은 취미가 있습니다. 바로 클래식 음악 감상입니다. 교향곡 한 곡이 40분에서 1시간입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익숙한 음을 따라 손을 가볍게 저어보거나 빠바바 바~~~, 입으로 나지막이 음을 따라서 읊조릴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이미지입니다. 박자를 맞추거나 음을 따라 하려면, 즉 익숙한 곡으로 만들려면 퇴직 전에 클래식과 친해져야 하겠습니다.


선행학습이 필요한 클래식


저는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클래식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토벤 소나타 17번 때문입니다. 빌헬름 켐프(1895-1991)가 연주하는 17번 '템페스트'를 듣고 나서 저는 며칠 동안 '베토벤 앓이'를 했습니다. 그 곡에서 삶의 모든 감정을 느꼈습니다. 노년의 빌헬름 켐프가 '템페스트'를 연주하는 흑백 영상을 요즘도 가끔 듣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체계적으로 클래식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저는 1년에 작곡가 한 명을 선정했습니다. 저는 새해가 시작되면 클래식 음약 사이트에서 돈을 주고 작곡가의 음악을 다운로드하여 USB에 담습니다. 자동차 USB 단자에 꽂아서 운전을 할 때는 늘 클래식만 듣습니다.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어느 정도 작곡가의 스타일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베토벤 교향곡 1번부터 9번까지 들었던 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5번 운명, 9번 합창교향곡뿐만 아니라 나머지 교향곡도 모두 보석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연말에는 작곡가의 자서전이나 평전을 사서 읽습니다. 곡에 작곡가의 이야기가 더해지면 클래식의 세계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베토벤을 시작으로 차이코프스키, 말러, 쇼팽, 바흐, 슈베르트, 브람스, 하이든, 멘델스존을 듣고 읽었습니다. 2022년, 열 번째 작곡가는 헨델입니다. 헨델의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메시아, 리날도, 세르세, 콘체르토 그로소, 바이올린 소나타를 다운로드하여 USB에 담았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동안, 저는 위대한 작곡가 베토밴, 쇼팽, 슈베르트, 브람스의 음악이 음악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서양음악사를 집대성한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이앤비플러스) 상권, 하권은 저의 궁금증에 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


이 책에서 그리스 저술가들은 '음악이 개인의 윤리적 특성 또는 존재 및 행동의 방식인 에토스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라고 주장합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보에티우스는 성격에 미치는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음악이 고급 철학을 위한 입문서뿐 아니라 젊은이 들에 대한 교육에 있어 중요하다고 믿었다.'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음악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충분히 설명해줍니다.


"우리는 지금은 단순하게 들리는 음악도 한때는 강력한 관련성을 전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관련성은 오직 그것이 출범했을 때의 역사적 상황을 연구했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친절하게도 이 책은 그 시대의 음악을 이야기하기 전에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설명하고 연대기를 보여줍니다. 책 머리말에서 '새롭다는 것은 언제나 전통적인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비틀어 놓은 것이다. 가끔 너무 새롭게 보이는 것도 실은 저 옛날의 음악으로부터 일정 부분을 빌려온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음악의 형식과 기법은 서로 연결되고 계승되었습니다.


17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장르, 즉 칸타타, 오라토리오, 소나타, 샤콘느 등과 18세기의 바흐의 푸가, 헨델의 오라토리오, 하이든의 교향곡,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와 오페라도 르네상스와 그 이전의 음악으로부터 빌려서 재가공한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는 챕터를 넘길 때마다 연거푸 감탄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책을 쓸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저자는 음악 관련 원전(수도원 보관 도서 등), 종교사, 역사서, 장르별 그리고 지역별 음악사를 모두 꿰뚫고 이들을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엮었습니다. 그 방대함에 놀라고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풀어낸 통찰력에 감탄하였습니다.


어떤 질문(예를 들면, 왜 헨델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는가?)에 대하여 맥락을 짚어가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요? 내 삶에 던져지는 질문들에 대하여도 그렇게 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산에서든, 서울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자동차 운전이 즐겁기는 힘듭니다. 클래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차 안에서 세상 시끄러운 뉴스를 끄고,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영어방송을 끄고 클래식에 접속하는 게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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