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될 수는 없지만

이문재 시인의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by 필우

시인이 될 수는 없지만 저는 시를 좋아합니다. 하루에 한 편의 시를 읽습니다. 출근하는 시간, 더디 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고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시 한 편 읽습니다. 마지막에 읽은 한 줄을 걷는 동안 머릿속에 한번 더 굴려봅니다. 아름다운 시인의 마음을 새겨보곤 합니다.


시집을 사서 읽기도 합니다. 이문재, 김해자, 문정희, 황인숙, 신경림, 허수경, 김용택, 안도현, 나희덕 시인을 좋아합니다. 책 꽂이에 정렬된 시집 제목만 한 번 씩 읇조려도 시인들의 세계를 엿보는 것 같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백석입니다.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을 읽고 더 백석에 빠졌습니다.


시를 옮겨 써 놓기도 합니다. 가로 21cm, 세로 15cm 크기의 카드에 시를 옮겨 적곤 합니다. '삶과 연대, 사랑, 가족, 창의, 순수', 이렇게 다섯 개의 범주로 나눠놓고 시를 베껴 두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김용택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 조소영 시인의 <하지감자 사랑>, 김경미 시인의 <엽서, 엽서>이성선 시인의 <초상화>. 한 번씩 마음이 헛헛할 때 카드를 한 장씩 넘기며 노래합니다. 위로가 됩니다. 용기가 솟습니다.


노래를 듣습니다.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그리운 건 다 내 잘못'이라는 이문세의 <오늘 하루>, '난 어쩌면 그 사람과의 만남이 잘 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는 김장훈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런 가사들이 한번 머릿속에 박히면 사나흘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노래들이 시입니다.


최근에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 사서 읽은 시집이 한 권 있습니다.


이문재 시인의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요즘 누가 시집을 사겠습니까?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준다는, 책 제목이 암시하는 사연이 궁금해서 구입했습니다. 2주 동안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면서 읽었습니다. 페이지는 많지 않았지만 연거푸 읽고 생각을 모아보았습니다.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주다 울기도 했었다.(생략) 언제, 살아 있다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까, 대체로 시인이라는 사실이 싫다, 너를 죽이고 싶다.”

(시인의 말, 1988년 2월)


30여 년 전, 이문재 시인이 시집 <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를 펴냈을 때, 시인은 시인이 싫다고 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를 살려내는 기획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이문재 시인도 포함되었습니다. 다시 발행된 시집에서 시인의 말은 전과 달랐습니다.


“매번 처음이다. 이 오래된 처음이 누군가의 처음과 만나 또 다른 처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시의 축복이자 그 누군가의 축복이리라”

(개정판 시인의 말, 2021년 3월)


서른이 되기 전, 시인은 강과 아버지, 길, 시간을 노래하였습니다. 젊은 시인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잘라먹고 설명하려들지 않았습니다. 시인을 죽이고 싶었다는데 오죽하겠습니까? 몇 편만 소개하겠습니다.


“물은 그릇을 느끼지 않는다.”(<길> 일부)

“그가 나를 버렸을 때 / 나는 물을 버렸다 / 내가 물을 버렸을 때 /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낙타의 꿈> 시작 부문)

“낮술의 끄트머리 / 네가 한 말 / 살아생전 금서 한 권 펴내는 일도 아름답 / 슬리퍼 끌며 개울로 들어가며 / 풍덩 개울물에 몸 시리게 담그면서 / 가을이구나”

(<편집> 일부)


가장 마음에 와닿고 이해하기 쉬운 시는 첫 페이지에 실린 <돌팔매질>이라는 시입니다.


돌팔매질처럼 달려가고 싶어라

가장 높이 날아야

가장 아프게 떨어지는 그 힘으로

너에게 닿고 싶어라

너의 한 복판에 박히면서

한꺼번에 너의 땅에 뿌리내리는

풀잎의 속사정도 알고 싶어라

돌팔매질처럼 너의 벌판을 힘껏 두드리고 싶어라

단단히 바람의 빗질에 온몸을 씻고

너의 땅 바람 숭숭 드는 흙의 성긴 곳을

한 번으로라도 다져주고 싶어라.

(<돌팔매질> 전문)


때때로 아름다운 문장도 있습니다. 시 제목 자체로 시의 품격을 보여주는 시도 있습니다. 몇 번이나 곱씹어보다가 옮겨 쓴 글입니다.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 줄 때’(시 제목)

‘저문 길이 무어라 하더냐’(시 제목)

‘먹이를 하늘에서 구하는 새는 없다’(<새> 첫 문장)

‘물은 고요해져야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본다’(<물 위의 집> 일부)

‘저문 강 / 아버지의 담배 연기를 실어 나르는 저문 강은 고요하다 / 아버지는 나를 위해 강을 키운다 한다’(<저문 강을 이름 붙이려 함> 일부)

‘잠복기가 일정치 않은 돌림병처럼 / 봄밤은 무섭다’(<봄밤> 시작 부문)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는 젊은 날, 이문재 시인의 고뇌와 감성을 보여줍니다. 거칠게 써 내려간 말들은 지금의 시인을 설명합니다.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주었던 시인은 여전히 세상과 자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지만 따뜻하고 친절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는 오로지 몸에서 나온다


저는 이문재 시인을 산문집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2009)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2014)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창작과 비평>(계간지)과 <녹색평론>(격월지)에서 시인을 가끔 만났습니다.


시인의 시에 대한 생각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 새겨봅니다. 시인은 시詩는 '미래에 대한 징후를 읽어내는 예민한 감수성이자 상상력'이라고 하면서 이때의 예감은 ‘지식의 양이나 경험의 부피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오로지 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내가 잃어버린 '몸으로서의 나'는 결코 누군가 또는 그 무엇이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무서운 사실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온전한 몸을 만나는 일은 전적으로 투쟁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이다."(<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중)


젊은 날 시인의 시를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시인은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주고, 움직이지 않으려는 돌에게 질문합니다. 저문 강에서 아버지의 담배연기를 보고 삶을 배우고, 사랑하는 이에게 닿고 싶어 멀리 돌팔매질을 하였습니다. 모두 몸이 기억한 말들입니다. 30년 이상 시인이 이어온 일입니다.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


시인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글을 쓰지 않으면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인위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자신과 대화하기 쉽지 않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지 못하는 인간, 그리하여 경제논리에 포섭된 채 안정적 삶을 지속하는 인간을 나는 ‘소비자’라고 부른다. 이때의 소비자는 ‘최후의 인간’이다. 생각하지 않는 존재, 노예적 존재이다.”

(이문재, <녹색평론>(2015년 9-10월호) 중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 인용)


글 쓰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없다고 하니 뭐라도 써야겠습니다. 뭐라도 쓰려고 하니 생각거리가 있어야겠기에 책을 읽습니다. 단 하루도 가방 속에 책을 넣어두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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