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임시 계약직이라도 잡기 위해서는 건강이 우선입니다. 저는 50대 중반이 넘어서야 술과 이별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나는 고통의 끝을 맛보았다.
그즈음 술자리가 이틀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밤 12시가 넘어서 속이 더부룩한 것을 느끼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입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선혈을 발견했습니다. 세면대에 흩뿌려진 피를 보고 정신적 충격으로 어질 했습니다. 곧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인 놀라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출혈로 인한 쇼크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신체적으로 아주 좋지 않은 징조라는 것을.
옷을 갈아입고 아내, 아들과 함께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초음파, CT 등 온갖 검사를 받았고 여러 개의 수액을 꽂았습니다. 응급 수술을 받았습니다. 식도에서 터진 정맥을 막기 위해 일반 내시경보다 더 큰 특수 내시경을 사용했습니다. 의사는 내시경을 집어넣으면서 구역질과 기침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과다 출혈 위험 때문에 마취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정신줄을 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여기서의 정신줄이란 목숨줄입니다.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지 않겠노라고.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지. 청소년 때부터 보유하고 있었던 간염이 성인이 되면서 간경화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중년이 되면서 식도에 핏줄이 불거져 나오는 '식도 정맥류'라는 합병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날 목구멍 쪽으로 튀어나온 정맥이 사고를 친 것입니다. 일주일 넘게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해운대에서 바다 수영을 하다가 죽을 뻔한 이후 두 번째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 삶은 해운대 수영 사고 이후 덤으로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삶이 덤이라니, 저는 참 염치가 없는 놈입니다.
저는 소동이 진정되고 난 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다시 한번 검사를 받았습니다. 간 질환 치료 전문 의사는 '근본적인 원인은 간염에 있으나 결국 술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따로 치료할 것이 없으니 잘 관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술 못 마신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직장인에게 저녁 한 번 먹자, 는 말은 '술 한 잔 하자'는 말로 통용됩니다. 어떤 간부는 '술 잘 마시는 직원이 일도 잘한다.'라고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술을 못 마시니 물이나 마시겠다.'라고 하면 '그래 , 탄산이라도 한 잔 시켜',라고 말하는 간부는 훌륭한 분입니다.
제가 술자리에서 자기 건강만 챙기는 사람으로 오해받는 건 다반사입니다. 꼬치꼬치 묻는 사람에게는 피 토하고 응급실에서 수술받았다고 하면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술을 안 마시겠다고 말하는 데 이렇게 큰 용기가 필요할 줄 몰랐습니다. 최근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술자리가 줄었습니다.
요즘엔 무알콜 맥주도 많이 나옵니다. 술자리가 있는 날, 술 마시는 시늉을 내고 싶을 때면 저는 편의점에서 무알콜 캔을 구입합니다. 색깔도 맛도 비슷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알코올 프리 맥주는 하이*캔이다. 이것도 마시다 보면 취기가 오릅니다. 술자리에 취하고 사람에 취한다지 않습니까? 저는 그 기분을 정확하게 맛봅니다.
저도 간절하게 술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기분 좋은 성과를 이뤄냈을 때, 많이 우울할 때,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술 생각납니다. 개금에 있는 병원에서 생명선을 걸쳐놓고 줄타기를 한 이후, 맥주를 마신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가족들과 여수에 놀러 갔을 때였습니다. 여수 밤바다가 제가 맥주를 '딱 한 잔' 권했습니다.
그럭저럭 술 마시지 않고도 사회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술이 생각나면 술 맛나는 이야기를 읽을 때도 있습니다. 여행지에 마시는 맥주보다 더 맛있는 술은 한낮에 땡땡이치고 마시는 맥주 한 잔이 아닐까요?
구스미 마사유키의 <낮의 목욕탕과 술>
"아직 해가 중천인데 목욕탕에 갔다가 대낮부터 맥주를 마신다. 이보다 더한 사치와 희열이 있을까? “
주인공 우쓰미 다카유키(42세)는 광고회사 영업사원입니다. 광고를 따내기 위하여 여러 업체를 방문하다 보면 몸이 축 처집니다. 그에게 피로를 씻겨줄 목욕탕은 최고의 휴식처이자 에너지를 충천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거기다 목욕으로 뜨거워진 몸이 식기 전 생맥주 한 잔, 그리고 입에 착 감기는 안주,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을 내기에 충분합니다.
<낮의 목욕탕과 술>(애니북스)에서 주인공은 ‘도장 깨기’하듯이 도쿄의 목욕탕 여덟 곳을 순례합니다. 부서에서 늘 꼴찌를 맴도는 영업실적 때문에 상관에게 쫓기듯이 사무실을 나서는 우쓰미 다카유키, 몇 군데 영업을 하다가 ‘앗, 이런 곳에, 이렇게 멋진 목욕탕이!’라고 외치면서 우연히 발견한 명소에 감탄합니다.
주인공은 목욕탕이 자리 잡은 거리 분위기를 설명하고 입구부터 목욕 공간의 분위기, 벽화, 온수탕과 냉수탕, 편의시설을 그림과 함께 소개합니다. 거리를 걷다가 어쩌다 마주친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주인공이 몸을 담근 목욕탕은 엄선된 곳입니다.
재래식 가마를 갖추고 장작으로 물을 데우는 ‘가마타 온천’,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쓰바메탕’, 목욕탕 안에 정원이 들어선 ‘다카라탕’, 리뉴얼을 마친 뒤 굿디자인상을 수상한 천연온천 ‘히사마쓰탕’, 목욕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방문하기를 소망하는 곳입니다.
주인공은 목욕을 마치면 반드시 음식점에 들릅니다. 간단한 요리와 함께 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서의 독백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와 이 책의 원작자가 같은 사람입니다. 만화가이자 뮤지션인 ‘구스미 마사유키’입니다.
주인공은 식당에 자리 잡은 후 생맥주 한 잔을 급하게 주문합니다. 이어서 메뉴판을 보며 고민을 거듭하다가 안주를 주문합니다. 저자는 두부를 살짝 데쳐서 양념장에 찍어 먹는 유도후, 쇠간 튀김, 해물 야키소바, 고등어구이, 카레 만두를 맛깔나게 소개합니다. 공복이라면 책을 덮는 게 좋습니다.
우쓰미 다카유키는 ‘땡땡이를 친다.’는 죄의식 때문에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 항상 머뭇거립니다.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핑계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거래처가 감소하고 마구잡이로 영업하다 보면 거절당하기 일쑤다. 그 상태에서 사색이 된 얼굴로 영업을 계속하면 다시 실패하고 평판도 떨어지게 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목욕과 한 잔의 청량한 맥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고 에너지를 충천하여 다시 시작하는 것이 백번 낫다. 이런 식입니다.
주인공의 설명을 핑계로만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영업사원의 특성상 청결한 외모는 좋은 인상과 함께 상대방에게 신뢰를 줍니다. 자신 있는 외모는 자신을 우쭐하게 만들면서 내면의 자신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또한, 대낮에 목욕탕에 가고 술을 마시는 행동에 대하여 책임감 또는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우월감과 죄의식’의 복합적인 감정은 그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공간’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처럼 머물렀던 공간의 기억을 되살리며 지나간 삶도 함께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삶에 의미와 재미를 함께 줄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도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삶입니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넓은 목욕탕을 혼자 차지하는 일, 저질러도 좋겠습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사치와 희열에 푹 빠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