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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우 Jul 02. 2023

'냉국수'를 '콩국수'로 읽었다

신중년, 이제 글도 제대로 못 읽는다

일을 마치고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여름이다.


"뭐 먹을래? 돼지국밥이나 한 그릇 할까?"

"아니야, 콩국수 먹으러 가자. 내가 봐 둔 음식점이 있어."


내가 앞장섰다. 직장 근처에 국수와 김밥을 잘하는 분식집이 있다. 여름이 되니 식당 앞에 입간판이 새로 섰다. 콩국수 개시. 당연하지! 여름에는 공국수지. 평소 음식을 잘하는 식당이라서 콩국수도 진한 콩국에 쫄깃한 면발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내게 콩국수는 아버지 음식이다. 아버지는 여름이 시작되면 콩을 한 포대 메고 집에 들어오신다. 여름에는 콩이 보양식이라는 굳건한 믿음 아래, 이틀에 한 번은 콩국수를 만들어 드신다. 면을 삶고 믹서기에 불려놓은 콩을 가는 것은 그리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아니다. 땀을 많이 흘리는 계절, 몸에서 배출된 나트륨을 소금 간으로 보충해 주니 그것도 좋다고 하셨다.


나도 여름에는 특별히 먹을 게 생각나지 않으면 콩국수를 택한다. 콩국수 잘하는 집이 흔하지는 않다. 주방에서 직접 콩을 갈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식당에는 물을 많이 섞어서 밍밍한 맛이 난다. 제대로 된 식당의 콩국물은 보약이다. 이런저런 기대를 안고 식당에 들어섰다.


"사장님, 콩국수 두 그릇하고 김밥 한 줄 부탁합니다."

"예?(끝을 올리며) 손님, 냉국수 말하는 거죠? 우리 집에 콩국수 안 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입간판에 콩국수 시작한다고 쓰여 있는 거 보고 들어왔는데"

"냉국수 개시한다고 썼는데..."

"..."


대화를 하면서 입구 쪽을 다시 보았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냉. 국. 수. 개. 시'


점점 심해지는 확증편향과 시스템1


나는 왜 '냉국수'를 '콩국수'라고 읽었을까? 생각을 정리해 보자. 여름으로 접어들자, '더운 날에는 콩국수를 먹어줘야 해!'라고 강조하시던 아버지와 마루에서 땀을 식히며 맛있게 먹던 콩국수 생각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 입간판이 없던 분식집에 여름 맞이 새 메뉴를 알리는 간판을 내놓았다. 나는 무조건 콩국수 개시 간판일 거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더 더워지기 전에 가서 먹어야지, 하고 다짐하고 다짐했으리리. 오늘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나를 사로잡았다. 확증편항은 '나 자신의 견해 또는 주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그것의 사실여부를 떠나) 선택적으로 취하고,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말한다. 다른 말로 자기중심적 외곡(myside bias)라고도 한다('나무위키' 참고).


나는 해를 거듭할수록 확증편향이 점점 심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된다. 더군다나 매일 접하는 유튭, 페북, 별그램에서는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만 물어다 떠먹여 주고 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외골수나 꽉 막힌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몇 년 전에 읽은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도 떠 올랐다. 이 책의 저자, 대니얼 커너먼은 우리의 정신은 시스템1과 시스템2로 나뉜다고 한다. 시스템1은 저절로 빠르게 작동하며 노력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치 않고, 자발적인 통제를 모른다. 이에 반해 시스템2는 복잡한 계산을 비롯해 노력이 필요한 정신활동을 관장한다. 


나는 입간판을 보는 즉시, 시스템1이 작용해서 나의 두뇌를 장악하고 침샘을 자극하고 결국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는 행동에까지 이르렀다. 조금만 더 찬찬히 입간판의 글을 읽어 볼 생각을 했다면 그 식당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시스템1과 시스템2의 조화가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일요일 아침, 집에서 아내에게 콩국수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더니 명쾌하게 결론짓는다.


"늙었어, 노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해"


  주문한 열무 국수가 나왔다. 열무 줄기가 입속에 터질 때마다 시원함이 식도를 거쳐 위장까지 쑤욱 내려간다. 여름에는 열무국수지.


D-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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