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우 Sep 21. 2023

내게도 우산을 말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퇴직 후에도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까?

출근길 우산은 사무실에 도착하면 처치곤란이다. 물기 묻은 우산을 그대로 구석에 둘 수는 없는 일, 여기저기 빈 공간을 찾아본다. 일찍 온 직원은 벌써 복도 한 구석에 자기 것을 펼쳤다. 비좁은 사무실은 나의 우산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고, 습기 찬 채로 하루를 보내라 한다.


승진을 하고 나니 크지는 않지만 내 공간이 생겼다. 내가 앉은 의자와 창문사이, 우산 펼치기 좋은 공간이 있다. 우산을 펴면서 내 마음도, 입술도 펼쳐진다. 이게 이렇게 좋아할 일인가?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비에 젖은 우산 한 번 펼쳐보려고 젊음과 열정, 수모를 바쳤던가? 이 년 후 나도 이 건물을 떠나겠지만 그동안은 이 공간을 즐겨야겠다.


내가 집을 나가야 하는 이유


몇 해 전부터 '공간은 권력이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또는 사회적으로 직책이 높을수록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돈도 중요하다. 돈이 많을수록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 공간에 대한 생각은 퇴직이 가까울수록 더 해졌다.


  퇴직 후에도 나는 집에서 나와서 일하러 가는 척하고 싶다. 내가 집을 나서면 갈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집을 나와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집에만 있게 되면 스스로 나태해지기 때문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 집이라는 공간의 목적은 '쉼'이다.  '쉬지 않고 일하기' 만큼, '일하지 않고 쉬기'는 위험하다. 영원히 나의 숨이 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는 아내의 눈치가 보여서다. 어느 주말, 이틀 연달아 집에서 쉰 적이 있었다. 점심때가 한 참 남았는데, 아내는 혼잣말로 '오늘 점심 뭐 먹지?'하고 중얼거렸다. 약간의 한숨과 함께. 내게 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았는데 나는 들어버렸다. 혼자 있을 때는 알아서 척척 챙겨 먹는데 식구가 하나 더 있으니 신경 쓰이는 것이다. 사실 나는 밥투정, 반찬 타박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건 좀 짠데! 

너무 달지 않아? 

맛이 왜 이렇지? 

이건 따뜻하게 먹으면 좋은데!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올까 봐 조심한다. 잘못하다간 밥줄 끊긴다. 


밥은 둘째 치고, 아내는 평소 혼자 쓰던 공간을 남에게 내 주니 그것도 마뜩잖을게 분명하다. 나는 집 나간 아들방에 생활할 수는 있다. 그것도 한두 시간이다. 봉쇄수도원에 있는 수도사가 아닌 바에야 방에서 나와서 이리저리 집을 헤집고 다닐게 분명하다. 공간적인 측면으로 보면 나는 아내에게 '침입자'다. '동물의 왕국'을 너무 많이 봤나?


퇴직 후, 나는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까?


퇴직을 832일 앞둔 지금, 나는 무조건 집을 나가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어디 만만한 카페를 정해 놓고 매일 다닐까? 한 곳만 다닐 수 없다. 요일마다 다른 카페를 갈까? 백팩을 메고 여기저기 카페를 전전하는 것도 좀 궁상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을 알아보았다. 오피스텔은 위치와 건물노후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도심지 내 지하철 역세권에  있는 새 건물일 경우, 임대료와 관리비는 내가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비쌌다. 오래된 건물은 좀 싸다. 공유 오피스 내, 개인 상주공간을 임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결코 싼 비용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추려면 한 달에 백만 원은 필요했다. 매월 정기적인 소득이 없는 퇴직자가 한 달에 백만 원은 무리다.


내가 퇴직 후에도 공간을 가지려면 돈이 필요하다. 고정적으로 백만 원 정도가 나올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가져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답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우산이 다 말랐다.


D-832일

매거진의 이전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허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