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하는 초2 아빠의 일상 스케치
소풍시즌이다.
아이가 있는 거의 모든 집에서 소풍날 새벽부터 김밥을 싼다.
나라 전체가 의구심을 갖지 않고 묵묵히 수행하는 의식이다.
어찌 보면 제사나 명절보다도 더 견고한 풍습이다. 선대가 아니라 자녀를 위해서이기 때문일까?
아이 소풍날이 다가오면서 (요즘은 현장체험학습이라고 부르던가?) 주로 사소한 불의와 비합리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강력하게 반발하는 아빠의 마음 한구석에서 강력한 저항감이 든다. 소풍날 김밥을 싸는 것에 대해서.
소풍날 집에서 싼 김밥을 메인으로 하는 도시락을 싸서 보내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불합리하다.
첫째, 김밥전문점에서 사는 것보다 맛있을 가능성이 적다. 특히 요즘에는 바르다 땡땡선생, 고땡땡 김밥 등 프리미엄 김밥집을 표방한 가게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재료도 특별히 신경써서 준비하지 않는 이상 결국은 대량생산된 가공식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프리미엄)김밥전문점에 비해 집에서 만드는 김밥이 몸에 덜 해롭거나 안전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단무지나 맛살을 직접 만들 건 아니니까.
둘째, 경제적으로도 크게 유리하지 않다. 마트에 가 보니 김밥 재료를 세트로 묶어서 파는데, 10줄을 쌀 수 있는 단무지, 우엉, 햄, 맛살과 김이 들어있는 세트가 5천원정도 한다. 집에서 새벽에 일어나 시간맞춰 밥 하고 김밥싸는 수고를 생각하면 5천원으로 프리미엄 김밥 2줄을 사서 보내는게 크게 비경제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셋째, 무엇보다 일상으로 바쁜 엄마들과 일하는 엄마들에게 전날 저녁에 재료 준비하고 당일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하고, 촛물을 만들어 휘저어가면서 붓고, 손에 익숙치 않은 김밥이라는 음식을 만들고, 작년에 썼던 도시락통이 마땅치 않아 새로 사야지 했다가 잊어먹고 그대로 써야 하는, 사이즈와 상태가 마음에 쏙 들지 않는 도시락에 김밥을 예쁘게 세팅해 넣으면서 아이에게 약간의 미안함도 느끼게 되는 그런 상황이 내심 불편했었다.
특히, 가사와 육아의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소풍날 도시락 싸는데 아빠들이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결국 소풍날 김밥 싸기는 일 년에 두 번, 엄마들만이 치러내야 하는 의식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사실 나 혼자..)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유래도 모르는 폐습에 몸을 던저 저항하고자 했다.
아이 소풍날 김밥을 사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강력한 '아빠가 집에 있어서 그랬어요' 라는 면죄부가 있지 않은가?
낮에 아이랑 같이 돌아다니며 놀고 있자면 궁금함과 측은함이 섞인 눈빛으로 우리 부자를 쳐다보다 문득 우리 뒤쪽 반경 20미터 구역을 둘러보다가 다시 우리 부자를 살펴주시는 눈빛을 가진 여러 이웃들은 양해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
아이도 이런 것에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 스스로 남과 비교하여 비참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굶지만 않으면 되지. 그리고 사 먹는 김밥이 더 맛있을 텐데.
우리 몸을 던져(아이한테는 아직 안 물어본 상태) 불의에 저항하고 김밥의 감옥에서 민중을 구출해 내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은 어이없어하는 아내의 한 마디에 실패했다.
'뭔소리야, 내가 쌀께'
소풍 전날 마트에 갔더니 엄마들 장바구니에는 김밥재료가 가득하다.
혹시나 김밥재료가 떨어질세라 맛살, 어묵 코너로 직행. 프리미엄 김밥재료 세트를 하나 장바구니에 넣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그 순간 문득 드는 생각이
가정 사정으로 김밥을 싸지 못하는 집들은 어쩌란 말인지?
아니면 아예 도시락을 준비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집도 있을 수 있지 않나?
내가 김밥을 쌀 수 있고, 내 아이를 위해 더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할수록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소풍날 점심시간은 더 초라해 지는 것이 아닐까?
일부에서는 무상급식이 맞네 안 맞네 하고 정치 쟁점화시켜 싸우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류의 박탈감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학교급식의 연장으로 소풍 당일 도시락을 일괄적으로 준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비용이 문제라면 체험활동비에 실비를 포함하여 받아도 되지 않을까?
소풍날 도시락을 사서 보내는 것이 아이에게 상처가 되거나 남의 이목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미리 주문을 받았다가 당일 새벽에 배달하는 비즈니스도 가능할 것 같다.
소풍 당일,
결국 아내가 새벽부터 일어나 정성스럽게 김밥을 싸서 아이 도시락을 싸 놓고, 남은 것은 아침으로 먹었다.
김밥을 아이 입에 맞도록 작은 사이즈로 잘 말았다.
김밥전문점에서 파는 김밥은 굵어서 한 입에 쏙 넣고 먹지 못하던 아이가 불편함 없이 잘 먹는다. 사 먹는 김밥은 매번 왜 예쁘게 먹지 못하냐고 아빠한테 혼났었지..
아내가 출근하고 나서 남은 김밥 재료로 김밥을 한 번 말아 보았다. 내가 먹을 것이니 밥도 좀 넉넉히 넣고 말았다.
김발에 넣고 둘둘 마는 것이 보기보다는 쉽다. 힘 조절이 중요할 것 같은데 얼추 잘 되었다.
문제는 김밥을 써는 것이더라. 김밥집 아주머니들 칼질을 흉내내어 앞뒤로 슥삭!
단호한 칼질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부서진 김밥을 먹으면서 괜히 머쓱해진다.
다음 소풍때는 도시락 싸기 의식을 간소화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