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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아빠곰 Oct 12. 2015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육아휴직하는 초2 아빠의 일상 스케치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아이가 학원 차에서 내려 의식처럼 향하는 곳이 있다. 

맞은편 아파트 단지 놀이터인데, 거기서 미끄럼틀에 있는 쇠 봉 타고 올라가기를 가르쳤더니 이제는 곧잘 기어올라가곤 한다.


어느 볕 좋은 가을날, 한 조각 남은 그늘에 끼어 앉아 아이가 놀이터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것을 보고 있다가 위험할 것 같으면 미끄럼틀 쪽으로 한 걸음 갔다가, 안전한 것 같으면 다시 그늘로 돌아오면서 아이 노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한참 놀다가 아이가 아빠를 찾으며 ‘아빠~’ 하고 부르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저 쪽에 모여서 역시 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엄마들 그룹에서 '쟤 아빠구나~' 하는 목소리가 놀이터를 가로질러 나에게는 명쾌하게 들리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들으라고 한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격지심때문인지 어쨌든 내 귀에는 아주 명료하게 들렸거든.


그.래.서. 내가 집에 있으면서 오히려 입성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쓰레기 버리러 갈 때도 옷을 갖춰입고 나가는데, 그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아이 키우는 엄마들 입장에서 낮에 놀이터에서 어슬렁거리는 중년 남성은 어쩔 수 없이 잠재적 클래스 A 위험요소일 수밖에 없는가보다.



그렇다고 매번 놀이터에 나와 있는 엄마들마다 먼저 말 걸고 다가서서 ‘저는 육아휴직 중이구요, 2학년 남자애 하나 키우고 있구요, 얼마 전에 이사왔어요. 그리고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시말해서 당신과 당신 아이를 해치지 않아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상황을 둘러싼 감정이 내 편에서는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보여진 데 대한 억울함이라면, 다른 엄마들에게는 위협과 동시에 ‘쟤는 왜 이시간에 여기에 있는걸까?’ 하는 궁금함이겠다.


시간순으로 생각해 보면 나의 존재가 다른 엄마들에게 주는 작은 공포와 의구심은 서서히 증폭되면서 지속되다가 애 보는 아빠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 고맙게도 아이가 '아빠~'라고 불러주는 것 같은 – 해소가 되는 것이고, 나의 불편함은 그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느낀 시점부터 시작되어 한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 – 안전한 NPC라는 것 – 을 상대방들이 인식했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까지 지속되는 것 같다. 아니다. 사실은 그 후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다. 나도 상처받기 쉽고 또 오래 간직하는 구석이 있는 남자다. 




놀이터에서의 아빠란 내 아이에게만 포커스를 맞추고 지켜보다가 우리 애가 다른 집 애랑 약간 마찰이 있다든지 하여 다른 사람의 시선과 겹치는 순간에서야 다른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이건 물론 나의 경우에 한하는 이야기라서 오로지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는 경우도,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린이용 놀이기구를 직접 타고 노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무리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그렇다. 


그러다 마주친 다른 사람의 수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다든지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괜찮은데 이렇게 나에 대한 다른 이들의 인식을 말로 정확히 듣게 되니까 마치 누명을 벗게 된 용의자 혹은 근거없는 루머로 마음고생 하다가 야간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나는 떳떳하노라고 말할 기회를 갖게 된 한물 간 연예인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이런 경우가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니 평소 나의 신조 – 너는 네 맘대로 살아라, 나는 내 맘대로 살련다 – 는 위축되고 매사 행동과 몸가짐에 좀더 남을 의식하게 된다. 

사실 이제는 머리 감지 않으면 밖에 못 나가겠다 ㅠ.ㅠ


워낙 험한 세상이라 엄마들의 반응을 십분 이해는 한다. 그러면서도 억울함은 감출 수가 없다. 


결국은 집에서 애 보는 아빠들, 일찍 퇴근해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빠들이 많아질수록 이런 어색함과 오해가 사라지겠지. 


나 나름대로 그런 변화의 흐름에 앞장섰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함께 느끼며 오늘도 학원 차 내리는 시간에 맞추어 아이를 데리러 나간다. 

물론 잘 씻고 면도도 하고 옷도 새로 꺼내 입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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