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하는 초2 아빠의 일상 스케치
우리 집은 국민 식생활 간소화를 위해 아침은 빵식으로 하고 있다.
(맞벌이나 바쁜 집들은 아침에도 5찬 7찬에 국까지 끓여 먹기에는 가사 부담이 너무 크다!)
그런데 아들녀석이 식빵을 주면 항상 테두리 껍질부분은 먹지 않고 남긴다.
어렸을 때야 우쭈쭈쭈 우리아기 부드러운 부분만 먹어라~ 하고 테두리를 떼어 주기도 했지만 7세 형님반 정도부터는 매번 혼나는데도 끝까지 안 먹겠단다.
오늘 아침에는 부자간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정확히 식빵 껍질의 어떤 요소가 싫은건지 얘기해보라고 다그쳤더니 '아빠가 빵 껍질을 좋아하시잖아요. 많이 드세요.' 한다.
9세 넉살에 넘어가서 헛웃음이 나온다.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빵 껍질을 안 먹는 이유가 맛인지 식감인지 색깔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먹기 싫었기 때문에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건지가 알고싶단 말이야.
아이도 이야기하다시피 나는 빵 껍질을 좋아한다.
아빠가 좋아하는 깡빠뉴, 호밀빵들은 껍질이 더 맛있다.
우리동네에는 마트 내에 있는 빵집과 프랑스 사람 이름을 가진 비싼 빵집에서 이런 빵들을 파는데 맛의 차이는 껍질 부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안쪽 부분은 비싼 빵이 약간 더 거칠고 구수한 맛이 나고 마트 빵은 별 맛이 없이 부드럽기만 하다. 가격 때문에 비싼 것이 좋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도 처음부터 빵 껍질을 좋아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사실은 아이의 모습과 내 어린시절 모습이 똑같다.
빵 먹을 때 껍질부분이 먹기 싫어서 몰래 떼어 놓곤 했는데 그러다 걸리면 그때는 외할머니께 뒤지게 맞는 날이다. 그 땐 음식을 남기거나 먹지 않으면 맞던 시대니까.
내가 빵 껍질 맛을 알게 된 건 여행이나 어학연수로 유럽에 갔을 때 그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통곡물이 들어 있고 거무튀튀하고 거칠지만 구수한 맛이 나는 빵들을 먹으면서부터였다.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나고 많이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은 맛있는 빵들.
한국에 돌아와서는 서울의 일부 동네에서만 맛볼 수 있어 아쉬워했었는데 요즘 시커먼 빵들이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도 서서히 퍼지고 있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으로 사다 먹고 있다.
아이가 남기고 간 빵 껍질을 먹어 보니 확실히 맛이 없다. 불에 타다 만 종잇장처럼 얇아 씹는 맛도 없고 약간 쓴 맛도 나는 것 같다. 맛이 없어서 안 먹은거구나.
하지만 아빠가 먹는 껍질이 맛있는 구수한 빵 또한 시커멓고 우툴두툴한 겉모습 때문인지 통 먹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빵이 있고 그 중 껍질 맛에 먹는 빵도 분명 있는데 '빵 껍질은 맛이 없어'. '난 빵 껍질 안 먹어' 라고 생각하며 먹어보지 않는다면 그저 어제도 먹고 그제도 먹던 빵들만 먹게 된다.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부모의 역할 중 중요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
아이가 알고 있는 세계보다 부모가 알고 있는 세계가 더 크고, 부모가 알고 있는 세계보다 알지 못하는 세계가 더 크다. 부모가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아 그것을 아이에게 정확히 잘 전달했다 하더라도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작은 나를 만들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부모가 알고 있는 세계만을 아이에게 이식하려 한다면 일방적인 강요가 되기 쉽다.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꼰대스러움이 그와 비슷할 테다.
그보다는 어떤 새로운 것을 만나도 도전하고, 시도해 보고,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생각의 회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회로가 유연하게 잘 작동하도록 하려면 어릴 때부터 다양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처했을 때 선입견이나 두려움을 갖기보다는 관찰하고 실험하여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생각의 지평이 확장되고 수용가능한 자극의 범위도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유기물을 동력으로 하는 2족보행 생체 로봇의 딥러닝 기능에 대한 설명 같다. 게다가 이 로봇은 짝을 찾아서 증식까지 할 예정이다(어디까지나 부모의 희망사항임). 멋지다! 다음 세대를 길러낸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 아주 작은 시도로써 아이에게 빵 껍질 맛을 알게 해 주어야 하는데 끈기를 갖고 먹여 보려 해도 참 어렵다.
빵 껍질을 강제로라도 먹여야 하나? 아니면 아무 거나 가리지 않고 팍팍 먹을 때까지 좀 굶겨 볼까?